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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l 29. 2019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건


장마철이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은 없어도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건이 하나 있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내가 대학교 1학년 때일이다.

 그날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여름날이었다.  딸의 학교를 처음 방문하신 아버지가 학교 후문 근처 허름한 해장국 집에 앉아있다. 그 앞에 앉은 딸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늘 대화가 많았던 부녀가 웬일인지 말 한마디 없이 밥을 먹는다. 아버지와 딸은 해장국 뚝배기에 고개를 묻고 숟가락을 뜨는 척하고 있지만 둘 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이다.





 나는 대학 1학년 첫 학기를  참 징그럽게 놀면서 보냈다.

중, 고등학교 내내 이렇다 할 사춘기 한 번 없이 참 무던하게 십 대를 보낸다 했더니, 빠른 83으로 19살 대학생이 되고 나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정면으로 맞았다.

 수업 역시 참 자주 째는 새내기였다. 그리고 그 시간에 (나만큼이나 정신없는) 선배나 동기들과 대낮부터 술을 마셨다. 수업을 안 째는 날에는 저녁에 술을 마셨다. 그러면 그다음 날 아침 수업을 쨌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 시기에 엄청난 고민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심경의 변화가 생길만한 일도 없었다. 그냥 대학생이 되었다는 것, 그거 하나 달라졌을 뿐이었다.

 내가 툭하면 결석하는 식으로 학교 수업에 무책임하자 어느 날엔 (함께 수업 들으려고 시간표를 같이 짰던) 착한 동기 3명이 인천까지 찾아왔다. 셋 다 집이 서울인 친구들이었는데, 정신 못 차리는 나를 인간 만들어보겠다고 서울에서 우리 집까지 온 것이었다. 그 날 넷이 맛있게 파파이스 햄버거 세트를 먹었는데 나는 친구들에게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고 이제는 학교 잘 다니겠다고 손가락 걸며 약속하였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약속했을 때는 이미 한 학기가 상당기간 지났을 때라 당연히 성적은 개판이었다. 결국 난 대학 입학 후 첫 학기에 학사경고보다 센 제적 경고를 먹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남자 선배 중 하나가 당시 유명한 야구선수의 방어율과 비교하며 놀려댔는데 야구의 룰을 몰랐던 나는 도통 뭔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현재 류현진 선수의 방어율보다 당시 내 학점이 낮다...)

 그때 학교는 1점대의 제적 경고 학생들에게 부모님을 동반한 지도교수 면담을 명하였다. 대학 입학 전까지 나름 모범생으로 살아왔던 나는 이 사태를 부모님께 어떻게 설명드려야 할지  답이 안 나왔다. 특히 어머니에게 이 사실이 발각되는 날에는 바로 그 날 집에서 쫓겨나는 상황이라, (어머니보다는) 방황의 낭만을 아시는 아버지께 도움을 청하였다.  아버지는 그 일로 화를 내시거나 혼을 내시진 않았지만 그 날 하루 내내 말씀이 없으셨고 그래서 나는 더 죄송스러웠다.

 아버지와 함께 지도교수와의 면담이라는 억겁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이번엔 (제적 경고를 먹은) 전체 학생이 강당으로 소환되었다. 지도교수님에게 나를 알린 것도 모자라 수업을 듣느라 오고 가며 낯익은 학우들에게 나를 알리는 시간이 또 온 것이었다. 다들 어머, 너도? 하는 눈빛이었지만, 차마 나서서 티 낼 수 없는 공감대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시선을 피했다.

 학교 측에서 제적 경고 먹은 학생들에게 너무 회초리만 드는 건 아닐까 느낄 때쯤 당시 교수로 재직하고 계시던 교수님 한 분이 나오셔서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다독임과 응원의 말씀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교수님은 우리 학교에서 실제 제적이 된 선배님이기도 하였다. 한 때 제적을 당했지만 그 후로 열심히 학업에 매진하여 지금은 모교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희망의 아이콘이었다. 제적 경고를 먹은 학생들에게 귀중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분이 하필 그런 이력을 가진 교수님이라니. 다시 한번 (그날 하루에 대한) 학교의 기획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승전결이 너무 완벽(?) 한 한 여름 낮의 꿈같았다.






 지금도 가끔 아버지는 그때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해장국을 먹었노라고 농담을 하신다. 부녀의 잊지 못할 장마철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송구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나는 장마철만 되면 그날을 얘기하며 웃음 짓는다.
 
 다행히 나는 그 날을 계기로 확실히 정신 차려서 무사히 학교를 졸업했다. 투수의 낮은 방어율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점수였지만, 인생 첫 따끔한 경고를 나름대로 잘 방어했던 사건,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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