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 당신은 내 미래인가요?
투 대리 프로젝트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는 (인턴으로 일했던 몇 개월을 제외하면) 나의 첫 근무지이자 유일한 근무지다. 회사 업무, 조직생활, 상사와 부하직원과의 관계, 직장인의 삶에 대한 모든 것들을 단 한 곳에서만 겪어 본 셈이다. 그래서 나의 경험이 다른 직장인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인지, 조금은 다른 게 있는 것인지조차 감이 안 잡힌다. 참고로 나는 2019년을 살고, 9년째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다.
최대리와 투 대리 프로젝트를 하기로 결의하는 자리에서 일단 우리는 우리의 회사생활 10년을 정리하기로 했다.
자그마치 10년을 일했는데, 생각보다 업무와 관련된 경험, 생각, 성장들이 너무도 미미하여 가슴 아팠다. 그래도 현 상태를 똑바로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 발자국 나아갈 힘이 생길 것 같았다. 둘이 카페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종이에 이것저것 끄적이다 제일 먼저 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자고 했다. 아마 우리 둘 다 좋은 상사에 대한 갈증이 가장 심했던 것 같다. 상사라는 말을 떠올린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 사람만 있었다.
-저는 집토끼가 아니라 산토끼입니다만
나의 첫 상사는 한 마디로 입에서 나오면 그게 다 말인 줄 아는 그런 분이었다.
입사 후 3주 정도 되었을까. 그분이 퇴근 후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남게 했다. 벌써 9년 전 일이라 솔직히 그 상황이 완벽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굳이 핏덩이 신입사원인 나만 따로 불러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을 해주셨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분의 표현이 조금 투박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분 말씀 중 내가 지금까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건 딱 두 가지다.
“어떤 학교를 나왔든 일 똑바로 해라.”
“일을 할 때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아라.”
개개인의 성장배경, 가치관, 성격, 경험에 따라 저 말은 별것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갈굼을 극도로 혐오하는 편이다. 나는 '나'의 사소한 이력 하나하나를 굉장히 소중히 여기고, 내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사실에 대해 퍽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필 나의 첫 상사는 처음으로 가지는 둘만의 대화(?) 시간에 그 두 가지를 건드렸다.
사실 이때 어느 정도 눈치를 챘어야 했다. 조직과 상사는 '나'라는 존재와 '나의 생각'에는 특별히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것이 있는 듯 없는 듯하거나, 아예 없을수록 관심을 가져준다. 조직이라는 그물 안에 들어와 놓고 파닥파닥 거리는 내가 그분에게 참 불편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분을 그로부터 4년 뒤에 다른 지점에서 또 만나게 되었다. 두 번째 근무지에서도 업무적인 지적과 지시와 1도 상관없는 공격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그분 덕에 서류 위에 눈물도 쏟아보고, 아무리 상사라도 참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어렴풋이 알겠는 건 그분은 나로부터 나를 지우고, 부리기 좋은 부하직원으로 길들이려고 부단히 애쓰신 거 같다. 죄송하지만 나는 노동과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 적당한 자기 발전을 기대하고 입사한 거지 당신께 길들여지려고 입사한 것이 아니었다.
회사생활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수 만 가지지만 개인적으로 나의 가장 큰 어려움은 상사와의 관계였던 것 같다. 그 분과 일하는 동안 나는 스트레스가 극심해 일에 대한 의욕을 깔끔하게 잃어 갔고,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극에 달해 사무실에 앉아있기 힘들 때가 많았다. 피부가 수차례 뒤집혀서 병원 신세를 진 건 뭐 소소한 추억이다.
■ 업무적으로 프로페셔널한 롤모델,
■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책임감 강한 회사 내 멘토.
상사에 대한 나만의 정의는 지금 그 어디를 헤매고 있는 건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당신은 내 미래인가요?
9년 동안 회사를 다니며 파악한 상사의 권한에 이어 상사의 복지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전날의 과음이 근무시간에 영향을 끼쳐 근무태만을 보여도, 근무시간에 소소한 취미생활(?)을 누려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실무자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바빠 죽어도 책임자들은 늘 유유자적했다. 조직에 대한 그분들의 앞선 공헌과 기여를 감히 내가 가늠할 수 없다 해도, 이 모든 것이 용인되기에는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사란 나같이 온갖 잡스러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직급에 걸맞은 큰 그림을 그리는 분들이잖아. 일의 양보다는 질로 승부하시는 걸 거야.”라는 나이브한 기대로 정신승리를 해보려고 한 시절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업무의 특성인지, 조직의 한계인지 업무적인 노하우와 전문성 없이도 긴긴 세월 상사 행세를 하며 그 자리에서 오래오래 만수무강을 누리셨다. 그걸 그대로 보고 자란 나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장래희망이 과장이고 차장이고 부장이었다.
사실 이러한 것을 느낀 것은 벌써 몇 년 전이다. 하지만 짬도 안 되면서 뭣도 모르고 떠드는 꼴이 될까 봐, 시간이 지나면 회사도 달라질 거라고 막연하게 기대하다가 어느덧 10년 가까이 흘러버렸다. 9년 동안 나도 내 업무강도 대비 회사에서 주는 월급과 복지에 꽤 만족하며 살아왔다. 나만 두고 생각했을 때는 그랬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나는 아무런 발전을 하지 못했다. 발전은커녕 뒷걸음질 쳤다. 그저 돈을 벌고 쓰는 것에 충실했다. 내가 믿어온 상식과 인과관계를 산산 조각내는 특정 상사들을 미워하면서도 언제부턴가 그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이제 나는 김 과장, 김 차장, 김 부장이 아닌 다른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