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롭게 13] 우리가 싸운 적이 있었나?
처음부터 [미련]이 흘러나올 줄이야. 야밤에 할아버지가 그 노래를 들으며 그런 미소를 지으실 줄이야. 어디서든 본듯한 곳과 사람들에 마음을 놓았더니, 뒤미처 미련이 남는 장면이 여럿 있었다. 침묵 속에서도 말이 들리고, 말속에서도 침묵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장면마다 인물 속에 빠져드는 농도가 달랐고, 일인칭 시점의 이야기처럼 들리고 보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그의 시점)
중국에서 일이 어그러지면서 형편이 어려워졌고, 그나마 좁은 빌라에서도 나가게 됐다. 순간 아버지, 아니 솔직히 말하면 혼자 살고 계신 이 층 양옥집이 생각났다. 두 아이 옥주, 동주와 그곳으로 가야 할 것 같다. 그나마 머리가 커진 딸아이는 자꾸 할아버지 허락은 받았냐고 물어보는데, 내가 불효자인 걸 이미 눈치챈 것 같다. 엄마 없는 아이들에게 아빠 역할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다. 아버지께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다행히도 집을 들어서는 순간, 묘한 안도감이 든다.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 남매는 이 집에서 오래 살았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마당도 거실도 주방도 중문도 이 층도 모두 늘 변함없는 아버지를 닮았다. 남매가 할아버지와 잘 지내주길 바랄 뿐이다. 나는 빨리 짝퉁 신발이라도 팔아서 자금을 만들고, 그걸로 천장사라도 시작하고 싶다.
옥주와 동주를 보니 나와 누이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덩달아 이 집으로 들어온 누이는 제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혼을 하겠단다. 내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형편이 좋지 않아 아버지 병원비도 제대로 내지 못하니 체면도 서지 않고, 그저 맥주에 오징어만 구워줄 뿐이다. 무뚝뚝한 아빠 대신 나를 엄마로 여기며 잘 따랐던 누이의 생활이 힘든 걸 보니 마음이 더 무겁다. 하지만 아이들이 누이를 잘 따르고 잠시라도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니 고맙기도 하다.
옥주가 내가 파는 신발이 짝퉁이란 걸 알고 크게 실망한 눈치다. 그래서 경찰서에 있던 옥주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 신발을 팔아 쌍꺼풀 수술 비용을 마련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전에 한 켤레를 가지고 갔을 때는 모른 척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으면 그때 혼내줄 걸 그랬다.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하다.
삶은 고단하지만, 가족이 함께하는 순간만은 행복하다. 아버지와 누이와 오랜만에 한집에 있으니 잊고 있던 추억과 어머니 생각까지 난다. 누이는 지금도 엄마 꿈을 많이 꾼단다. 옥주도 지 엄마 꿈을 많이 꿀까? 동주는 가끔 엄마를 만나던데, 옥주는 미운 마음이 큰 것 같다. 얼마 전에도 동주가 엄마에게 받아온 선물 때문에 한바탕 한 모양이다. 다 내 탓인 것 같아 미안할 뿐이다.
아버지의 생신. 제대로 해드릴 형편이 안되어 작은 케이크만 준비했다. 다행히 동주가 웃긴 춤으로 흥을 돋우었고, 옥주는 기특하게도 모자를 사 왔다. 아버지는 그 모자를 쓰고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셨다.
세상은 복잡하지만, 아버지와 어린 남매, 그리고 어른 남매가 함께하는 여름밤은 평화롭다. 엄마가 없어 누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건지, 쟤들도 예전 우리 남매처럼 자주 투닥거린다. 그 모습을 보니 어린 시절 생각이 더 난다. 기억인지 꿈인지 모를 장면이 여럿 스쳐 간다. 누이와 술 한잔을 하다 보니 더 그런 것 같다. 나는 차라리 더운 여름이 더 좋다. 찬 바람이 불면 서글퍼지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면 코끝이 찡한 느낌이 난다.
얼마 전부터 아버지에게 치매 증상이 보였다. 안쓰러움보다 현실적인 걱정이 앞서는 내가 미웠다.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함께하고 싶어 했지만, 누이와 나는 결국 요양원으로 모시기로 했다. 내가 아버지라면 너무 서운하실 것 같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으니…. 우리 남매는 요양원을 보고 왔고, 곧 그곳으로 모실 생각이다.
나도 생각은 했지만, 누이가 말을 꺼내는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누이는 내가 이 집을 넘겨받을 거라 생각을 했는지, 팔자고 했다.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결국 누이는 집을 내놓았고, 옥주는 할아버지 허락 없이 그런다며 화를 냈다. 자기는 내 운동화도 마음대로 팔았으면서 집은 왜 못 파냐고 말도 안 되는 화는 냈지만, 씁쓸했다. 현실도 아버지도. 어떤 여자가 집을 보러 왔고, 잘하면 팔릴 것 같다. 옥주는 여전히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다. 할아버지와 빨리 정이 든 것 같다. 가족이란 게 그런 것 같다. 사실 옥주 말이 맞기도 하다. 불효라는 걸 알지만, 막막한 현실에 어쩔 수가 없다.
결국 아버지는 집을 판다는 말을 듣고 쓰러지셨다. 아버지의 기억인 이 집을 나는 왜 지우지 못해 안달한 걸까. 곧바로 병원으로 모셨고, 금방 회복하실 것 같았는데…. 누이는 계속 울었고, 나는 슬픔보다 죄책감에 더 괴로웠다. 나중에 아버지를 어떻게 봬야 할지. 아이들 특히 옥주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상을 치르는 동안 아이 엄마도 잠깐 왔다 갔다. 장례를 마치고 아이들과 나는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밥을 먹었다. 겨우 밥 먹는 시늉을 하던 옥주가 크게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옥주의 시점)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고, 그 집을 팔겠다니, 아버지와 고모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말도 안 된다. 내가 아빠 몰래 남친에게 준 운동화와 아빠가 할아버지 몰래 파는 이 집이 어떻게 같나. 나는 남친을 만나 위로받고 싶었는데, 운동화에만 정신 팔린 그를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짝퉁 운동화를 강제로 벗겨 자전거에 실었다. 내가 아빠에게 신발을 돌려주면 아버지도 그 집을 할아버지에게 돌려줄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믿을 수가 없다. 장례식장에서 꿈을 꿨다. 기억이 아닌, 그냥 꿈. 사실은 엄마가 보고 싶었는데, 정말 할아버지 장례식에 왔다. 오랜만 온 가족 함께 밥을 먹으니 좋았다. 동생도 신이 났는지 노래하고 춤까지 췄다. 참, 가끔 내게 반말하는 동생이 얄미워서 싸우기도 하지만, 기억이 안 나는 싸움일 때가 많다. 꿈을 깨는 순간 다시 할아버지 죽음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과 나는 차마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밤 음악을 듣던 할아버지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아빠가 밥을 차려주셨지만, 넘어가지 않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말 없어도 통하던 할아버지도, 늘 짠한 아버지도, 엄마 같은 고모도, 밉지만 늘 보고 싶은 엄마도, 없으면 안 되는 내 단짝 동주도 그냥 우리 가족 모두가 생각나는 울음이었다. 하지만 옆에 없어도 우리는 가족이니까, 죽는다고 헤어지는 건 아니니까. 나는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절대 잊혀지지 않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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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다 보고 며칠 후, 불현듯 할머니가 자주 부르시던 그 노래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 시골집 아랫목의 온기와 누워서 할머니 표 곶감을 받아먹던 나, 수많은 기억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잊고 있던 그 시간을 떠올리게 해 준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내게 충분했다.
[Zoom-in]
- 할아버지는 내 말 이해 못 해
- 아니, 잊어버리고 있던 기억을 왜 꿈을 꾸냐고
- 넌 자존심도 없냐
- 라면 끓여줄까?
[음악]
이 노래가 나오는 순간 반가움과 안도감, 그리고 기대감
먼 훗날에 돌아온다면 변함없이 다정하리라...
https://www.youtube.com/watch?v=yXsCvNQYBF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