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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롭게

와일드 로봇

[영화롭게 14] 넌 로즈라고 불러도 돼

by 리오라

여기에는 로봇과 동물이 등장한다. 인간을 제쳐두고 기술과 자연이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물론 인간도 살짝 보이지만, 그저 현실감을 일깨우는 양념일 뿐이다. 로봇이 나온다는데, 그렇다면 소설 『클라라와 태양』에 나오는, 로봇친구(AF: Artificial Friend) 대신, 로봇엄마(AM: Artificial Mother)가 등장하는 공상과학 이야기일까? 아니면, 이세돌을 흔들며 심리 게임을 한 알파고처럼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과의 공존이나 위협을 보여주는 이야기일까?


이것은 그것보다 더 복잡하고 흥미진진한 사람 이야기, 더 자세히는 관계 맺음에 관한 이야기다. 로봇과 동물 주연이지만, 친절과 공감, 우정, 모성, 공존, 고통, 상실 등을 다루는 매우 인간적인 이야기 말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이 아닌 로봇일까? 감정도, 융통성도 없고, 도덕적으로 중립인 만능 로봇을 등장시키면 이야기 전개가 좀 더 자유롭고 상상의 폭도 넓어지며, 캐릭터 변화가 크고 따라서 감동도 더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 모두에게 익숙한 <미운 기러기 새끼>까지 등장시켰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정해진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로봇 ‘로줌 유닛 7134’, 일명 로즈는 인간의 요구를 충족하도록 설계된 기계다. 하지만 수송선 난파로 동물만 사는 야생 섬에서 깨어나고, 이런 소통 불가 장소에서조차 미션 수행을 위해 분주히 다닌다. 존재 이유가 주인 즉 타자이기 때문에, 그 대상이 누구든 설령 동물일지라도 누군가를 돕고 친절을 베푸는 일에 충실하며 자의든 타이든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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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자신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야생 동물들과 관계를 맺는다. 똑똑하게도 그들의 언어를 듣고 학습한 뒤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물론 의사소통이 된다고 마음소통까지 되는 건 아니지만, 교활한 여우에게 친절을 베풂으로써 마음을 얻는다. 처음으로 친구가 생긴 여우는 통역사를 자처하듯 공감력 제로인 로즈에게 그곳 상황을 해석하고 이해시키며 야생 생활에 적응하도록 돕는다. 그렇게 어린왕자의 한 장면처럼 이들은 서로를 길들이며 귀중한 인연이 되고, 그렇게 발전한 우정은 따뜻하다 못해 눈물겹다. 친구를 만나고 사귀기가 쉽지 않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즉흥적이고 변수가 많은 야생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던 로즈는 갑작스럽게 새끼 기러기를 떠맡게 된다. 존재 목적과 프로그래밍을 넘어 엄마 노릇까지 하게 된 것이다. 압도적인 책임감으로 입양한 새끼를 정성껏 돌보는 과정에서 로봇의 기러기화, 기러기의 로봇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며 이 둘 사이에 단단한 끈이 생긴다. 특히 비행을 가르치기 위해 밤낮으로 희생하는 초보 엄마의 따뜻한 모성은 감동 그 자체다. 하지만 늘 위기는 있는 법, 슬픈 가족사를 듣게 되면서 그들의 관계가 흔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원칙이 아닌 돌발행동을 하고 본부로 돌아갈 유일한 방법인 신호 막대를 깰 정도로 로즈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대하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시작은 우연한 만남도, 책임감도, 위기 극복도 아닌, 바로 이름 짓기다. 이름을 짓고 부름으로 진짜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단순한 명명이 아닌 책임과 사랑을 뜻하듯, 로즈도 새끼 기러기에게 고심 끝에 이름을 지어준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차갑고 어려운 숫자 이름 대신, 관계적인 이름 ‘브라이트빌’과 ‘로즈’라 부르게 된다. 그렇게 김춘수의 꽃이 이 둘 사이에서도 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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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계 맺음은 그들을 넘어 다른 동물들로도 이어진다. 먹이 사슬 법칙이 자연스러운 야생 동물들은 로즈가 만든 노아의 방주 안에서 본능을 죽이며 고난의 시기, 추운 겨울을 나고, 그렇게 서로를 위하고 돕는 관계를 맺는다. 생존의 위협 속에서 공격이 아닌 공존을 모색하며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로즈의 한결같은 친절과 책임감, (자신은 몰랐지만) 사랑이 빚어낸 결과였다.


물론 영화에서 <미운 기러기 새끼>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서 다른 기러기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빌은 큰 생존 위기를 통해 무리 속에 자연스럽게 섞이고 결국 리더가 된다. 로봇엄마와 살면서 기러기처럼 생각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위기 극복의 열쇠가 된 것이다. 하나하나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기러기들이 주는 교훈이 오리들보다 많은 건 확실하다. 그건 안데르센도 인정할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빌은 자신을 배척하던 기러기 무리와 가족이자 친구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한다.



어쩌면 뻔한 이야기 속에서도 이 영화가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대부분의 성장 영화가 청소년 중심인 데 반해, 초보 엄마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로즈를 통해 부모의 모습 즉, 사랑, 고민, 혼돈, 두려움, 피로, 과잉보호, 인내심, 학습 과정 등 수많은 주제를 생각하게 하는데, 아이를 키우면 아이만 성장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큰 감동을 준다.


또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말하는 장면도 꽤 인상적이다. 놀란 빌을 다독이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내는 여우의 모습과 이야기가 무슨 도움이 되냐며 반문하는 로즈에게 ‘왜 아이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해 달라고 조르는가’에 답이 될만한 이유를 정확히 알려준다. 바로, 이야기를 들으면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 영화 이야기 또한 어느 곳,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게 느끼게 해 줄 것임이 틀림없다.


더불어 이 영화는 감동뿐만 아니라 웃음도 가득하다. 변수에 익숙한 야생 동물들과 고지식한 인공 로봇의 대조적 특징이 웃음을 자아내고, 관계 맺는 노력 속에서 벌어지는 재미있는 상황들이 이 영화를 한결 돋보이게 만든다. 이것이 말뿐 아니라 귀엽고 독특한 표정과 시각적 요소들로 드러나기에 그 효과는 배가 된다.


영화를 보고 나니 예상대로 가슴이 따뜻해졌다. 분명 이야기의 힘, 사랑받는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와일드 로봇도 로줌 유닛 7134도 아닌 ‘로즈’를 빨리 또 만나고 싶어졌다. 어쩌면 로즈를 기다리고 있을 여우보다 더 간절히.



[Zoom-in]

- 친절함은 생존 기술이 아니야.

- 이야기가 브라이트빌에 무슨 도움이 되지?

- 너답게 날아. 남들 따라 하지 말고.

-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거지.

- 제발 내 기억은 지우지 마세요.



[음악]

영화 음악을 맡은 크리스 바우어스(Kris Bowers)는 재즈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하다. 클래식과 재즈를 다 공부해서 음악적 폭이 넓다. 다방면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재즈 연주를 들어보면 얼마나 매력적인 연주자이자 작곡가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영화 음악에서도 웅장한 오케스트라 느낌과 재즈적 요소가 섞여 있다. 특히 오케스트라와 함께 사용되는 타악기 소리가 꽤 다채롭다. 여우가 나타날 때 재지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처럼 인물이나 내용에 따라 음악적 분위기가 확실히 구분된다. 마렌 모리스가 부른 <Kiss The Sky>, <Even When I'm Not>뿐만 아니라, 비행 훈련이나 마지막에 싸우는 장면에서 나온 벅찬 음악도 꽤 인상적이다.

영화를 봤다면, Ost의 제목을 살펴보며 꼭 다시 들어보길 바란다. 영화의 감동이 고스란히 살아날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46bzE6sAm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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