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롭게

룩백

[영화롭게 15] 언제까지 만화 그리게?

by 리오라

뭔가를 끄적이다가도 매번 넋두리만 하는 것 같아 말도 글도 자제하며 지낸다는 친구의 말이 눈더미에 꺾인 나무처럼 서글프게 들렸다. 하지만 그 자제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안 쓰는 것보다 낫지 않아?’ 우리 사이 암묵적 질문이 아직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이곳에 글을 쓰는 걸까? 또 왜 요리하고 곡을 만들고, 영화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추는 걸까? 일상의 창작 행위부터 업으로 삼는 예술까지, 왜 쉼 없이 뭔가를 만들어내는 걸까? 그리고 그 열정은 어떻게 이어지는 걸까?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힘은 무엇일까? 이 영화를 관통하는 질문들이다.


창조 또는 창작 행위로의 예술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순수한 창작 열망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해방의 도구는 더 충만한 삶으로 이끈다. 더불어 개인의 고통이나 아픔을 표현하고 극복하는 매개체이자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다리다. 창작 행위 속의 공감과 연결성은 그 어느 순간보다 강력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것은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고통의 씨앗을 품고 있기도 하다. 과연 1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이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까?


담고도 남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예술이다. 이 영화는 창작자 즉 예술가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고, 이 질문들의 대답을 찾도록 문을 열며, 동시에 우리의 내면도 살펴보게 한다.




초등학교 4학년 후지노는 에너지 넘치는 자유로운 야망가로 자신감이 가득하다. 신문에 4컷 만화를 독점연재 중이라 칭찬도 독점. 단, 등교 거부 동급생, 어마한 작화 실력의 쿄모토가 나타나기 전까지만이다. 쿄모토는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외부 세계의 두려움으로 갇혀있지만, 유일한 탈출구로 그림에 몰두 중이다. 후지노는 경쟁심에 불타 우정도 성적도 포기하고 가족의 걱정을 살만큼 그림에 매진한다. 하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혀 연재를 포기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자기 한계를 뛰어넘으려 노력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열정이 아니라 경쟁의 열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창작의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쿄모토가 고백한 팬심은 다시 만화를 그릴 불쏘시개가 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환희와 기쁨으로 빗속을 걷고 뛰는 장면은 압권이다. 모든 감정이 뒤섞인 표정,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그 설렘의 표정은 예술의 힘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그렇게 그 둘은 예술적 동지가 되어 서로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후지노는 쿄모토에게 자극받아 더 좋은 작품을 그리고, 대인공포증이 심했던 쿄모토는 껍질을 깨고 세상으로 나온다. 이 둘의 우정은 창의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동시에 더 나아지려는 압박감에 압도당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언뜻 보면 경쟁 관계가 우정으로 바뀌는 너무 익숙한 이야기라 그렇게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뻔한 이야기라고 감동이 없는 건 아니다. 서로 나은 만화가가 되도록 격려하는 모습과 창작에 수반되는 헌신과 집착, 자기 회의 자체가 이 작품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너한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일어서고 싶어


하지만 늘 후지노에 의지하던 쿄모토는 더 나은 실력을 쌓고자 미대에 들어가기로 한다. 혼자 대학 생활은 무리라는 후지노의 말에 연습하겠노라고 자기 목소리를 내며 진짜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그렇게 남겨진 후지노는 만화 연재를 시작하며 전문 창작자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예술의 길엔 늘 고난이 따르는 법, 이 창조에너지가 늘 긍정적인 건 아니다. 어떤 것은 집착으로 변해 상상도 못 한 무서운 심연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도 현실의 비극, 도저히 창조에너지로도 감당할 수 없어 보이는 그 광풍이 몰아치며 관객의 마음을 휘젓는다. 우정과 예술에 초점을 맞추던 이야기는 파괴적인 비극에 직면하면서 어두워진다. 예상치 못한 사건 앞에 후지노는 쿄모토가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삶과 경력에 미친 영향들과 마주한다. 감독은 이런 전환을 섬세하게 보여주며 정서적 무게감을 유기적으로 느끼게 한다. 이 영화가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상실과 고통의 순간이며, 이것은 카타르시스와 구원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는 예술의 능력을 보여준다.


고통으로 얼룩진 후지노는 그림을 통해 친구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붙잡은 법을 찾는다. 여기에서 영화는 단순한 구조로 끝나지 않고 평행이론처럼 다른 조건 속에서의 그들의 만남을 보여줌으로써 더 특별해진다. 이 만남에서도 왜 만화를 그만뒀냐는 쿄모토의 물음에, 다시 그리고 있다며 조수 제안을 한다. 여전히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고, 더불어 예술도 붙잡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다.


룩백’ 즉, 우리말로 ‘등을 본다’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의지하고 기댄다, 도움이나 영향을 받는다, 경험하다’ 등의 긍정적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상대보다 뒤처지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거리를 두다’라는 뜻도 있다. 이렇게 ‘등’이라는 단어는 연결과 비연결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예술은 결과뿐만 아니라, 그 과정이 자체가 에너지다. 그래서 등을 보며 따라가는 것이 예술의 힘이다. 팬으로서 후지노의 모든 만화를 사 모으고 독자 편지를 쓰는 것도, 사인해준 옷을 방에 걸어두는 것도 이 모든 것이 후지노에게 창작의 힘이 된 것이다. 등을 대주고 앞에서 끌고 나가는 것도, 바라보며 따라가는 것도, 그러다 지치면 밀어주는 과정 모두가 예술인 셈이다. 그래서 서로의 등을 보며 따라가던 과거를 여러 시선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있었다.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후지노는 다시 작업실로 돌아와 늦은 시간까지 그림을 그린다. 후회도 고통도 위로도 그림 속에서 해결하려는 모습이 짠하면서도 뭉클하다. 고통 속에서도 계속되는 일상, 마감이 기다리는 예술가의 숙명, 미묘함과 쓸쓸함이 그 등 뒤에서 가득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절망과 상실로 끝나지 않는 것은 예술가가 고통을 벗어나는 방법이 결국은 창작의 고통뿐임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삶과 예술, 우정에 대한 감동적 성찰을 담았다. 단순한 이야기지만 두 젊은 예술가가 이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직면한 개인적 도전과 실존적 위기를 탐구한다.


작가는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무능해 보이는 예술의 무력감에 시달리다 이 작품을 통해 마음을 정리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이 영화는 예술의 역할과 힘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진지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창작 과정을 이상화하지 않고, 고립과 좌절, 불만족 등 개인적 고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특히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후지노의 뒷모습을 자주 보인다. 고민하며 수시로 머리를 긁적이며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리는 진지한 표정이 거울에 비쳐 보인다. 이 시각적 라이트모티프는 창작자의 고독과 괴로움, 기쁨, 슬픔, 헌신, 외로움 등 광범위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또한 이 영화는 많은 예술가를 괴롭히고 후지노가 고통 속에 마주하는 질문인 ‘만약 ~ 했다면?"을 우리에게 던진다.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내리는 결정이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단순한 예술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삶과 우정, 우리의 결정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이야기다.


아쉬웠다. 러닝 타임도 짧지만, 억지로 늘린 서사가 없어 속도감이 붙어서인지 더 짧게 느껴졌다. 군더더기가 없다. 연출, 각본,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 오시야마 키요타카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책상 앞에 붙어 있었을까? 후지노의 뒷모습에서 감독이 느껴졌다.



[zoom in]

- 그냥, 그려 바보야!

- 그림은 어릴 때나 그리는 거 아냐?

- 등에 사인해주세요.

- 방에서 나오길 잘했어.

- 방에서 꺼내줘서 고마워.



[음악]

음악은 두 캐릭터의 복잡한 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감정선을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아름답고 감성적인 멜로디뿐만 아니라 침묵도 전문적으로 활용해 훌륭한 방식으로 조화를 이룬다. 소리가 없는 장면 또한 소리를 느끼게 하는 마법이 곳곳에 가득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ZpFZtyLloHo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와일드 로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