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의 목적

풍선초 이야기(5)

by 리오라

오늘 아침은 유난히 고요하고 충만했어요.

잠에서 막 깨어난 내 몸 위로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았고, 맑게 씻긴 하늘은 투명한 푸르름을 드러냈지요. 어디선가 종달새 노랫소리까지 들려왔어요. 오늘만큼은 ‘귀여운 날’이라고 불러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어요.


늘 그렇듯, 이 집 아이는 오늘도 내게 다가와 똑같은 인사를 건넸어요.


“풍선이, 잘 있었니?”

늘 같은 말이에요. 대체로 똑같지요. 조금은 다르게, 좀 더 창의적인 인사는 할 수 없는 걸까 싶기도 했지만, 귀여운 날이었기에 나는 슬쩍 잎사귀 하나를 흔들어주었어요. 아이는 뭔가를 오물오물 씹고 있었는데, 마치 보랏빛 물결이 공기 속으로 번져 나가듯, 달고 짙은 포도 향이 집 안을 가득 채웠어요.


그 순간, 오래된 기억 하나가 스르르 열렸어요.

뒤로는 푸른 산이, 앞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던, 햇살 좋은 언덕의 포도밭 가장자리. 참 멋진 곳이었어요. 내가 뿌리내리고 살던 그곳은 참으로 아늑했어요. 어떤 이는 나를 잡초라 여겨 뽑아버렸을지도 모르지만, 그 땅의 주인은 나를 알아보았고,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남을 수 있었어요.


포도는 사실, 남보다 가까운 혈육 같은 존재였어요. 덩굴처럼 얽히고설켜 자라나던 그들의 곁에서 나는 더없이 편안했지요. 알알이 영글어 가는 포도송이마다 은근한 향기가 피어올랐고, 나는 그 향기에 취해 하루를 보냈어요. 인간이 포도주에 취한다면, 나는 포도 향기에 취했지요. 술보다 더 깊고 은밀하게 스며드는 것이 바로 그 향기였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아침, 이 집 아이가 씹고 있던 것이 포도는 아니었음에도, 입을 움직일 때마다 낯익은 향기가 흘러나와 내 마음을 오래전 그 시절로 데려갔어요.

아, 이 향기… 이 아침… 모든 것이 반짝이며 근사했어요.


그러나 그 순간, 내 눈에 낯선 그림자가 들어왔어요.

화분 한쪽 구석, 잎사귀 그늘 아래에 이상한 존재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지요. 머리는 산발로 흩어져 있었고, 고개는 깊이 숙여져 있었어요. 어젯밤 문은 닫혀 있었는데,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걸까요?

나는 긴장한 잎사귀들을 바짝 세운 채 그쪽을 주시했어요. 꼼짝도 않는 걸 보니 잠들어 있는 듯했지요. 하지만 화가 치밀어 올라 결국 외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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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누구야?”

그러자 낯선 존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어요.

“나…? 백합 가문의 ‘’야. 여러해살이풀이지.”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 왜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왔냐고!”

“너도 나한테 누구냐고 물었잖아… 그런데 말이지… 나도 잘 모르겠어. 눈을 떠보니 여기였거든. 나도 당황스러워. 어제까지만 해도 논두렁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 눈을 뜨니 이 좁은 곳이야. 혹시 네가 내가 들어오는 걸 못 본 거야?”

“그게 말이 돼? 네가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른다고? 너 혹시 기면증이라도 있는 거야?”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잠은 좀 많은 편이야. 하지만 정말 모르겠어요. 분명 논가에서 있었는데, 눈을 뜨니 여기였어. 나도 황당해. 그런데 왜 날 매섭게 보는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게 싫은 거야?”

“싫지! 난 '1 꽃 1 화분' 주의야! 너랑 같이 살기엔 좁아. 그리고... 미안하지만 너는 내 취향도 아니야. 솔직히 말해 우리는 어울리지 않아.”


“나라고 좋겠어? 하지만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 찾아오기도 해. 어느 날 눈을 뜨니 낯선 곳인 것처럼 말이야. 나는 자주 여행을 다니는 편이야. 인간도 많이 만났고, 피곤한 일도 많았지. 그래도 깨달은 게 있어. 바로 ‘목적’이란 거야. 나는 사람들 입으로 들어가는 운명을 타고났어. 처음엔 두려웠지만, 이제는 받아들였어. 자기 목적에 충실한 삶만큼 빛나는 건 없는 것 같아. 너는 어때? 네 목적은 뭐야?”


뜻밖에 진지한 물음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화기가 가라앉았어요. 게다가 인간들의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운명을 지녔다니, 괜스레 서글퍼지더라고요. 하지만 어떻게 이 집에 들어왔는지는 궁금했어요. 포도 향을 퍼트리는 아이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는 꾹 참았어요.


그런데 그 말이 내 안에 오래 머물렀어요. ‘목적’이라....

나에게도 그런 게 있을까요?

혹시 이 낯선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일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어떤 인연인 걸까요?


그때,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엄마, 이거 뭐야? 왜 우리 풍선이랑 같이 심어놨어?”

“아는 분이 귀한 부추라고 주셔서… 둘 데가 없어서 잠깐 풍선이 옆에 심어둔 거야. 곧 화분 사서 옮겨줄게.”

“풍선이 격 떨어지잖아. 얼른 옮겨줘. 얘 놀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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