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함에 익숙해져야 해

풍선초 이야기(16)

by 리오라

문뜩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라요.

그때 처음 들은 말이었는데, 지금도 그 뜻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엄마는 내게 지루함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하셨어요.

그땐 웃으며 말씀하셔서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마나 중요한 말이었는지 잘 몰랐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같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마다 발자국이 찍히는 속도가 다른 게 눈에 들어와요. 어떤 사람은 개미들이 피해 갈 틈을 주는 것처럼 느릿느릿 발자국을 남기고, 어떤 사람은 도무지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지나가기도 해요. 발 밑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죠.

참,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곳에만 생명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람이 보지 못하는 수많은 자리에도 분명히 생명은 있어요. 그래서 가끔은 인간들에게 초정밀 안경이라도 씌워주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면 너무 놀라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할 수도 있겠죠… 갈수록 시력이 안 좋아지는 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라요.


아무튼, 세상은 갈수록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같아요.

아, 그래서 심오가 나만 보면 풍선은 언제 열리냐고 묻는 걸까요?

사람들은 우리만의 속도를 잘 이해하지 못해요. 예전에 어떤 꼬마가 “엄마가 내 마음을 몰라줘서 속상해”라며 울던 걸 본 적이 있어요. 그나마 우리와 속도가 비슷하나 건 아이들 같아요. 그것도 어린아이들.


그래서일까요, 아이들이 내게 다가오면 괜히 반가워요. 우리는 같은 속도로 세상을 보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빠른 세상에 오래 있다 보면 나조차 마음이 초조해질 때가 있어요. 가끔은 나도 얼른 풍선을 맺고 싶어 져서 괜히 안절부절못하기도 해요.

‘왜 아직 안 달리지?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지?’

처음에는 자꾸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초조함이 지루함으로 바뀌더니, 어느 순간은 힘이 빠질 만큼 무기력해지기도 했어요.

ChatGPT Image 2025년 10월 1일 오후 01_53_30.png


그럴 때면 또다시 엄마의 말이 떠올라요.

‘지루함에 익숙해져야 해.’


그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엄마는 내가 이런 시간을 겪을 걸 이미 알고 계셨던 걸까요?

아니면 엄마도 지금 이런 시간을 견디고 계신 걸까요?

이렇게 시간이 오래 기다리는 것, 한결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정말 맞는 걸까요?

아니면 나는 뭔가 잘못 가고 있는 걸까요?

나만 이렇게 제자리걸음인 건 아닐까요?

풍선이 맺히면 조금은 덜 지루해질까요?


지루한 시간엔 괜히 생각이 많아져요. 아직 나는 이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엄마가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쓸모없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나쁜 것도 아니겠죠.


모든 것에는 자기만의 속도가 있어요.

사람의 발자국도 다 다른 속도로 찍히듯,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는 저마다의 속도, 리듬이 있어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나에게도 나만의 속도가 있어요. 그리고 내 속도도 언제나 같은 건 아니에요. 어느 때는 빠르고, 어느 때는 느려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나는 모두와는 다른 존재라는 점이에요.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나만의 속도를 갖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어쩌면 지루함에 익숙해진다는 건 기다림을 기꺼이 즐길 줄 아는 마음일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은 아직 많이 즐겁지는 않지만… 익숙해지면 언젠가는 즐겁게 느껴질까요?


나는 특별한 존재예요. 그렇게 믿어요.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고, 지루함도 그 시간 안에 아주 중요한 일부라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내가 꽃을 피우고 풍선을 매달아야만 특별해지는 건 아니에요. 나는 흙을 뚫고 나오는 그 순간부터, 아니 작은 씨앗 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특별했어요.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고 칭찬해 줄 때만 특별한 게 아니에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엄마의 말이 다시 떠올라요.

지루함에 익숙해진다는 건, 나를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요?

그 지루함조차도 ‘내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요.

지루함 속에 이렇게 깊고 단단한 힘이 있을 줄이야…

지루함은 이겨내는 것도, 견뎌내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익숙해지는 것, 몸에 배게 두는 것이죠.


엄마 말씀이 맞았어요!

내가 나중에 맺을 풍선 속에는 이 지루함도 분명 들어 있을 거예요.

어쩌면 그 풍선의 가장 많은 부분이 바로 이 지루함으로 채워질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갑자기 이 지루함이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해요.

지루함에 더 익숙해질 무렵, 풍선이 맺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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