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

풍선초 이야기(18)

by 리오라

“나는... 그러니까... 오랜만에 내 소개를 하려니 좀 어색하네. 음, 난 야래향.”

“야래향? 처음 듣는 이름인데…… 뭔가 특별한 느낌이네.”

“너도 모를 줄 알았어. 그래도 중국집이라고 안 한 것만도 다행이야……”

“무슨 뜻인데?”


밤에 피어나는 향. 나는 해가 지면 꽃을 피우고, 태양이가 오면 조용히 숨거든.”

“왜 그렇게 사는 거야? 밤이 더 좋은 거야?”


“좋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밤이면 향이 더 짙게 퍼지는 것 같아. 그래서 내 주위엔 모기나 파리가 얼씬도 못해. 사람들은 그래서 날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예전엔 그냥 모기 아줌마가 나한테 삐진 줄만 알았는데, 어느 날 조심스레 와서 말하더라고. 내 향이 너무 강해서 가까이 오기가 무서웠대. 사람들에겐 좋은 향기일지 몰라도, 친구를 잃은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쓰렸어. 그래도 어쩌겠어, 이게 난데.”


“밤에 피는 꽃이었구나. 난 꽃들은 늘 낮을 좋아하는 줄만 알았어. 내 꽃님이도 낮에 더 잘 웃거든. 그런데 너처럼 밤을 사는 친구라면 밤에 참 많은 걸 보겠다. 그치?”

“응, 밤에도 낮 못지않게 많은 일이 일어나.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야래향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문득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어요. 우리는 왜 저마다 다른 속도로, 다른 방법으로, 다른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걸까요? 누가 우리를 이렇게 다르게 만든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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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꼬리를 물듯 이어지자, 밤을 사랑하던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올랐어요.

몸이 약했던 분꽃은 태양이를 좋아하긴 했지만, 햇볕을 오래 쬐면 너무 피곤해져서 주로 밤에 나와 놀곤 했어요. 그 친구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밤의 얼굴을 제대로 알게 되었어요. 분꽃은 나에게 여러 친구를 소개해 주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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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는 달님이를 좋아하던 달맞이꽃도 있었어요. 우리는 보통 태양이랑 더 친했지만, 그 친구는 오직 달님이와만 친했어요. 달님이가 구름 아줌마 뒤에 숨으면,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다른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는데, 나는 그 슬픈 사연을 끝까지 듣지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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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박꽃도 떠올랐어요. 지붕 위에 앉아 조용히 세상을 내려다보던 친구. 그 눈빛만으로도 단정함이 느껴졌어요. 나는 개인적으로, 미스플라워 대회에서 1등을 한 백합보다 박꽃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맑고 깨끗한 아름다움이 마음까지 정화해 주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 친구는 말이 거의 없었지만, 묵묵히 품고 있는 이야기가 엄청나게 많을 것만 같았어요. 조용히 품고 있을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지 상상만으로도 벅찼어요. 아침이면 고개를 숙이느라 잘 볼 수 없었고, 그래서인지 그리움이 늘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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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만난 꽃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하늘타리꽃. 한눈에 들어오는 특별한 모습 때문에 한번 보면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 동네에서 멋쟁이로 소문날 정도였죠. 석양이 물들어야만 입을 열고 웃는 친구였는데, 우리는 장난 삼아 흰 수염이다, 흰 머리카락이라 부르며 놀리기도 했어요. 그래도 그 친구는 언제나 너그럽게 웃어줬어요.


야래향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기억이 하나둘 떠올라 마음이 뭉클해졌어요.

그리고 깨달았죠. 밤을 사랑한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건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그 친구들은 정말 강한 존재였어요.


그래서 나는 낮에 작고 힘없어 보이는 존재들을 쉽게 판단하거나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언제, 어떤 순간에, 어떤 모습으로 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요.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야래향의 향기는 낮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도록, 내 마음의 창을 맑게 닦아주었어요.

밤의 향, 달빛에 스며든 그림자, 조용히 흔들리는 잎사귀들....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진짜 이야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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