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의 종말에 대한 짧은 역사
워싱턴의 금요일 오후는 대개 회색이고, 브리핑룸의 공기는 늘상 재활용된 진지함으로 가득하다. 그날도 달랐어야 했다. 마이크가 켜지고, 질문이 날아가고, 현실이 답을 준비하던 순간, 캐롤라인 레빗 대변인은 민주주의의 광대극에 마지막 종을 울렸다. “Your Mom did.” 열 글자가 공중에서 뒤집기 묘기를 부리며 내려앉자, 기자단의 펜은 순간적으로 동결되었다. 미국 헌법은 언론의 자유를 보호하지만, 엄마 드립으로부터의 안전지대까지는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갑자기 명백해졌다.
그 장면의 기묘함은 바로 그 자연스러움에서 비롯된다. 마치 브리핑룸이 오래전부터 스탠드업 클럽이었고, 우리가 그걸 이제야 인정하게 된 듯했다. 레빗은 정보의 전달자가 아니라, 고도로 훈련된 한 명의 관객을 위한 퍼포머—오벌 오피스에 앉아 채널을 돌릴 권한을 가진 그 관객—로서 무대를 장악한다. 질문은 정책을 겨냥해 날아오지만, 답은 유희의 법칙을 따른다. 웃음을 얻는 쪽이 이기는 게임, 반박은 편집되고, 불편한 사실은 다음 회차로 미뤄진다. 그 사이에서 공적 언어는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공적 책임은 밈처럼 빠르게 소비된다. 무엇이 맞는가보다 무엇이 바이럴한가가 더 진지한 기준이 되자, 진지함은 우스워지고 우스움이 진지해졌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즉흥극이라면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 그러나 쇼가 끝난 뒤에도 무대장치는 그대로 남는다. 같은 주에 정부 부처는 언론의 접근을 ‘상식’의 이름으로 줄이고, 질문의 자격을 ‘안보’의 이름으로 관리하려 든다. 그럴 때 “Your Mom did”는 단순한 무례가 아니라, 정책의 예고편으로 기능한다. 대중이 웃는 동안 제도는 미세하게 재배치되고, 웃음이 잦아들 때쯤이면 문의 손잡이 높이가 바뀌어 있다. 기자들은 여전히 들어오지만, 질문은 더 낮은 톤으로 시작하고, 대답은 더 높은 볼륨으로 끝난다. 그렇게 브리핑룸은 설명의 장소에서 조롱의 음향효과를 수확하는 스튜디오로 변모한다.
도시는 곧 새로운 지명을 외운다. 부다페스트가 회담의 배경으로 소환되고, ‘비자유’라는 수식어가 에스프레소처럼 진하게 마셔진다. 수입된 것은 장소만이 아니라 분위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세다. 권력은 냉소를 방패로 쓰고, 냉소는 사람들을 느슨하게 만든다. 우리는 허탈하게 웃고, 그 허탈함은 곧 체념으로 발효된다. 체념은 언제나 통치에 우호적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다 그러잖아”라는 한숨 반, 합리화 반의 문장이 공기를 채우면, 규범은 법보다 먼저 낡아진다. 낡은 규범은 문지방처럼 닳아 사라지고, 어느 날 문턱이 없어졌음을 깨닫는 건 신발 밑창뿐이다.
가끔은 이 모든 게 오해였길 바란다. 그 한 문장이 단지 피곤한 금요일의 실수였다고, 소셜 미디어의 착시였다고, 내일 아침이면 어제의 농담은 어제로 남을 거라고. 하지만 농담이 제 역할을 다했을 때 세상은 조금 달라져 있다. 농담은 경계를 시험하고, 경계는 시험 끝에 이동한다. 이동한 경계 위에서는 더 큰 농담이 가능해지고, 더 큰 농담은 더 큰 권력을 위한 더 큰 침묵을 준비한다. 그러니 “Your Mom did”는 누군가의 엄마를 모욕한 문장이 아니라, 모두의 공적 어휘를 재배치한 지령처럼 들린다. 우리에게 허용된 감정이 웃음뿐일 때, 웃음은 검열의 다른 이름이 된다.
브리핑이 끝나면 카메라는 꺼지고, 기사들은 마감으로 돌아간다. 헤드라인은 비틀리고, 캡션은 영리해진다. 독자는 스크롤을 내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정말 웃기다.” 그리고 “정말 웃기지 않다.” 두 감정은 같은 손가락으로 같은 하트를 누른다. 그 하트의 총합이 여론이라 불리고, 여론의 모양을 닮은 정책이 내일 발표된다. 우리는 다시 브리핑룸을 본다. 마이크가 켜지고, 질문이 날아간다. 대변인은 미소를 짓는다. 민주주의는 여전히 무대에 서 있다. 다만 오늘의 배역은 광대, 소품은 유머, 클로징 송은 박장대소다. 커튼콜에서 마지막 한 줄이 다시 날아들 수 있다. “Your Mom did.” 그때 우리는 묻지 않을 것이다. 누가 했는지. 대신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막았어야 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