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eding (1)
아침부터 느낌이 안 좋다. 어제부터는 뻐근하게 꼬리뼈 근처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충분히 잤는데도 아침 내내 피곤이 가시질 않는다. 출근한 다음부터는 아랫배도 아릿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잘 참아 넘겼던 옆자리 동현씨의 억지스러운 유머에도 짜증이 났고, 세수하다가 발견한 턱 정중앙의 뾰루지가 자꾸만 신경쓰였다. 뭘 해도 곤두선 신경 레이더에 주변의 사소한 잡음들이 어지럽게 얽혀든다. 이럴 때는 따뜻한 이불 속에서 충분히 늘어지고 싶은 마음 뿐이다. 오늘 아침 혹시 몰라 가방속에 챙겨온 핑크색 파우치를 떠올린다. 아무래도 오늘 안에 생리가 시작할 것 같다.
벌써 경력 17년차가 다 되어가는데 매달이 멀다하고 찾아오는 생리는 여전히 불편하고 짜증스럽다. 어쩌면 썩 좋지 않았던 첫 기억때문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아무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내 몸에서 피가 흐르는 당황스러움이란. 인류의 절반이 모두 겪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당황스럽고 겁나는 마음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수업 중에 이상하게 배가 아프길래 비밀리에 잠입했던 화장실에서 나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조그맣게 흩뿌려졌던 여아용 팬티에 죽음에 이르는 상처에서 흐른 듯한 새빨간 피의 무지막지한 자국이라니. 우리 반에서 생리를 하지 않는 여자애는 나 하나밖에 없었는데도 2차성징의 갑작스러운 습격은 나를 새하얗게 질리게 만들었다.
조잡한 성교육 만화에서 본 것처럼 양호실에서 생리대를 받아서 서툰 손놀림으로 착용하면서 나는 어쩐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앞으로 이 핏자국을 계속 봐야 하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한 번 쏟으면 다시는 주워담을 수 없는 그 날부터 나의 인생은 그 전과는 전혀 다른 경험들로 채워졌다.
초조한 기분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했다. 오늘 11시에 예정된 대형 거래처와의 미팅 때문이었다. 계약이 거의 성사되는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오늘의 미팅에서 쐐기를 박아야만 한다고 역설하던 부장의 커다랗고 괄괄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맴돌았다. 확실히 거래처가 계약서에 사인만 한다면 올 해 최고의 실적이 될 것은 자명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런 날 생리가 터질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으로 잔뜩 날카로워지다니. 어떻게 생각해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오늘같은 날은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들어가 늘어지게 낮잠이라도 자고 싶지만 실제로 그렇게 해 본 적은 없었다. 아마 일을 그만두고 몇 달 쉬게 된다면 그때는 가능하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이 든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에 한숨을 푹 내쉬는 모습을 본 건지 바로 위 사수인 대리님이 어디 아프냐고 묻는다. 벌써 티가 나나 싶어 얼른 아니라고 얼버무리고 진통제를 찾았다. 가방 주머니에 손을 쑥 넣었는데 일회용 인공눈물 두어개만 손에 잡힐 뿐 텅 비어있다. 아차 싶은 마음에 핑크색 파우치를 열고 뒤적여보지만 납작한 생리대 몇 개 뿐 플라스틱 약 포장지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어떡하지. 핸드폰 시계는 커다랗게 10시 53분을 알려주고 있다. 아무래도 점심시간에 조금 일찍 약국을 다녀오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같은 날 잠시라도 나갔다 오는 것을 걸렸다간 누구라도 한소리를 할지 모르지. 그럴바에는 그냥 한 시간 정도 더 아프고 마는 게 낫다.
“선배, 왜 그래요? ”
아침부터 흡연장에 다녀온 건지 동현씨가 담배냄새를 풍기며 자리로 들어왔다. 평소에도 짜증나는 담배냄새였지만 신경이 잔뜩 날카로운 지금은 더 역겹게 느껴진다. 내 표정이 안좋아보였는지 슬쩍 눈치를 보며 말을 거는 게 보였지만 상대해줄 기분이 아니었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기분나쁜 변화에 신경쓰느라, 그리고 몇시간 후 시작될 미팅을 신경쓰느라 다른 데는 별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왜요?”
“얼굴이 좀... 어디 아파요?”
다시 밀려드는 불쾌한 냄새. 담배에 자판기 커피라도 곁들였는지 퀴퀴한 입냄새가 음울하게 사무실 공기를 타고 코를 파고든다. 다른 때 같으면 희미한 냄새로 넘겨버릴 정도였지만 후각이 평소보다 예민해진 건지 짜증이 왈칵 치밀어오른다. 입을 좀 다물어 줬으면.
“아니에요.”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무시하려고 노력하면서 나름 친절한 태도로 대화를 끝내려는 나의 시도는 아쉽게도 실패했다. 동현씨는 눈을 도록도록 굴리면서 되물었다.
“진짜 괜찮아요?”
“네.”
“아닌데. 오늘 이상하게 짜증이 심하신데.”
한 음절짜리 대답이었는데도 짜증이 묻어나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미안한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자꾸 말꼬리를 잡고 말을 거는 태도가 짜증날 뿐이었다. 사람이 아프고 짜증난 것 같으면 가만히 두면 안 되는 걸까. 나는 매일같이 재미없는 농담도 들어주고 억지로 웃어주기까지 하는데. 심지어 짜증이 나긴 했지만 나는 예의를 갖춰 내 기분도 감정도 억눌러가며 참고 있는 참이었다. 짜증이 심하다니. 이렇게 억울할 데가.
제발 알아들으라는 심정으로 어금니를 악문 채 아니라고 대답한 나는 자기 입냄새 나는 동현씨를 무릎꿇리고 마구 소리지르며 내 감정을 쏟아내는 장면을 상상한다.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뿐. 곧 아래에서 느껴지는 찝찝하고 미끌거리는 느낌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번쩍 든다. 나는 가방에 들어있던 핑크색 파우치를 재빨리 꺼내들고 화장실로 걸음을 재촉한다. 기분이 더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