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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로 Apr 03. 2020

오래 달리기 그리고 떡꼬치

3가지의 달리기, 3가지의 경험

오래 달리기 그리고 떡꼬치


학창 시절, 나는 체육시간이 정말 싫었다.

무엇하나 특출 나게 잘하는 것 없는 소심하고 통통한 소년.

그리고 체육시간은 반에서 잘 나가는 애들만의 시간이었다.

특히, 무엇인가 연달아서 동작을 하는 수업은 정말 끔찍했다.

앞구르기던 뒷구르기던 나는 뭐든 잘하지 못했고, 그런 내 모습은 놀림거리가 되기 일수였다.


하지만 그런 나도 유일하게 잘하는 운동이 하나 있었다.

장거리 달리기.

단거리는 애들이 달리는 순간부터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잘 못했지만, 장거리는 달랐다.

엄청 빨리 달릴필요도 없고, 누구나 동등하게 시작할 수 있고 난이도도 높지 않다.

다만, 본인의 운동량이나 폐활량에 따라 기록이 갈릴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상하게도 폐활량이 좋았기 때문에, 잘 달릴 수 있었다.


부모님은 아들이 학교에서 놀림을 받는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셨다.

매일매일 힘들게 맞벌이 생활을 하셨었기에, 그런 여유를 갖지 못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나는 상황에 대한 원망보다는 부모님의 칭찬이 더 필요했다.

매번 장거리 달리기를 하고 온 날이면 부모님께 한껏 자랑을 늘어놓았다.


하루는 자랑을 늘어놓는 나에게, 어머니가 사실은 초등학생 때 육상선수였었다는 말을 해주셨다.

그리고, 네가 잘 달리는 것은 유전이라시며, 어김없이 내 아들이구나 하며 좋아하셨다.

부모님의 기쁨은 좋았지만, 학교생활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나는 변함없이 소심하고 뚱뚱한 친구였다.

그리고 매일매일은 결코 기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학교에서 운동회를 여는 시기가 되었다.

운동회도 역시, 반에서 주류인 녀석들의 독차지였다.

무엇하나 잘하지 못하는 나는 조용히 있다가 칠판을 보고 흠칫했다.

오래 달리기라는 종목에 나가고자 하는 친구가 없었던 것이다.

조심 스래 손을 들었고, 추가 희망자 없이 내가 선수로 선발되었다.


그 날은 집에 가서 또다시 자랑을 늘어놓았다.

엄마처럼 달리기 잘해서 내가 출전한다고.

어머니도 기뻐하셨고, 그 날은 휴가를 내서라도 꼭 오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으므로, 달리기 연습을 시작했다.

먹는 양이 너무 많아 살이 찐 상태라 힘들었지만, 열심히 달려보았다.


그리고 운동회 당일. 좋아하는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나섰다.

아침 조회시간에 종목별 나갈 학생들을 불러 미리 안내를 진행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오래 달리기 종목에 내가 아닌 다른 친구를 부르셨다.

뭔가 이상해서 선생님께 여쭤보았고, 답변은 단순했다.

'우리 반이 이겨야 하는데, 더 잘 뛰는 얘가 나가야지'


나 대신 나가게 된 친구는 평소 활발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였다.

그리고, 나는 평소 성격대로 큰 불만 없이 그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그 친구보다 잘 뛰었지만, 어차피 체육시간 속 내 모습에 선생님은 큰 관심이 없으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이어 어머니께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계단 올라가다가 넘어져서 다리가 아파서 못 뛰겠다고 했다고, 그래도 쟤가 잘 뛰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결국 딱히 출전하는 종목이 없게 되었고, 가만히 앉아 경기를 보며 운동회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점심도 소화가 다 될 때쯤, 오래 달리기 선수들은 준비하라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그런가 보다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어머니께서 내가 좋아하는 떡꼬치를 사주겠다고 하셨다.

아까 사달라고 했는데 왜 지금 사주냐고 말하는 나의 손을 붙잡고, 어머니는 문방구로 향하셨다.

그리고 웬일인지 2개씩이나 사주시는 떡꼬치를 다 먹은 탓에, 우연치 않게 달리기 경기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흘러내리고 가뿐해지다


재수 끝에 가까스로 시작한 대학생 새내기 시절, 나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여리여리한 모습의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던 친구.

하지만, 그녀에게는 나는 그냥 동기 오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그녀에게는 별 문제가 없었기에, 나에게 변화가 필요했다.

지금 상태로 다가서기에는 내가 너무 모자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첫여름방학을 시작했다.

더 이상 늦춰져서는 안 된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 일단 살이라도 빼보자.


그 날부터 먹는 양을 평소의 반 이상 줄이고, 하루에 10km씩 달리기 시작했다.

무리한 운동에 영양도 충분치 않았기에, 운동 외에는 아무 활동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다. 사실 매일 힘이 없어서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방학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멀쩡하던 나의 운동화는 어느새 헐다 못해 밑창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15kg를 들어낼 수 있었다.


그 맘 때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들은 너 내가 알던 걔가 맞냐며, 살이 쫙 빠진 내 모습에 크게 놀라곤 했다.

그 날의 뿌듯함을 간직한 채로 곧 여름방학이 끝났다.


몇 달 만에 만난 그녀는 나를 보며 놀랐다.

오빠 엄청나다고, 독한 사람이라며 웃으며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오랜만에 그녀와의 대화가 무척이나 즐거웠다.


기분 좋게 집에 와서 싸이월드를 켰다. 그녀의 미니홈피에 들어가 보았다.

곧이어 접속 중인 그녀에게 말을 걸어볼 계획이었으나, 일촌평들을 보곤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그 사이 이미 남자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상실감과 짜증남 그 사이 어느 언저리에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방학 중 신었던 그 러닝화를 신고 다시 달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딱히 뛸 이유가 없어졌음에도, 그냥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힘들다는 생각만 가득 안은채 뛰기 시작했었다.

힘들다 힘들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 그 생각과 함께 코스가 어느새 끝나 있었다.

그렇게 힘든 여름방학을 버텨왔었다.


이번에는 힘들다는 생각 대신 너에 대한 감정으로만 가득 채운채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걸음 한걸음 뛰어감에 따라, 땀과 함께 너에 대한 생각은 흘러내렸다.

그 날은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가뿐하게 10km를 뛸 수 있었다.




생각이 많아질 때는 땀과 같이 흘려내는 것이 좋다.


대학생 때의 경험 덕분인지, 생각이 너무 많아진다 싶으면 일단 달리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꽤나 자주 걷잡을 수 없는 고민에 휩싸일 때가, 해결할 수 없는 일들에 둘러싸인 것 같을 때가 있다.


이럴 때면, 더 이상의 고민은 집어치우고 무작정 달리러 나가곤 한다.



그렇게 달리기 시작하면, 머릿속에 가득 차서 땡땡부은것 같은 생각들이 땀과 함께 주르륵 흘러내리곤 한다.


걷잡을 수 없는 고민은 굳이 겉잡을 필요 없이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존재하지 않거나, 애초에 주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달리면 그런 생각들 조차 희미해지고, 머릿속이 기분 좋게 텅 빈 상태가 된다.


그때쯤 달리기 코스는 끝나게 된다. 이와 동시에 땀으로 흠뻑 젖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시작과는 달라진 자신과 함께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모든 상념을 흘려내려 보낸다.



어느새 스트레스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차오른다.


그리고 그 감정에 근거를 찾기 위해, 무엇이라도 시작하게 된다.


사실, 이 글들도 그렇게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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