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디 흔한 연애 이야기, 그리고 그 후
정오 무렵, 선선한 날씨에 침대에 누워 든 선잠 속 꿈에 갑자기 네가 나타났다. 잠들기 전 읽었던 책이 원인이었을까 생각해봐도, 내가 자기 전 읽었던 부분은 연인 간의 사랑 또는 이별과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었다. 내가 사실 널 그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을 해봐도, 나는 여전히 너에 대한 원망이 남아있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스스로가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는 상황이었다. 정확히는, 너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을 해본지가 언제인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너는 뜬금없이 찾아와 깊은 여운만을 남기고 금세 사라졌다.
꿈속의 알 수 없는 호선 지하철 역 앞에서 나는 비가 오는 바깥 풍경을 원망하고 있었다. 역 근처에는 흔한 편의점도, 사람들도 몇 없었다. 다만 저 멀리서 어떤 여자만이 본인의 친구를 배웅하고 있었다. 나는 대비할 수 없었던 소나기를 대비하지 못한 본인의 우둔함을 탓하며,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내가 가는 길에 반대편에서는 아까 얼핏 보였던 그 여자분이 우산을 쓰고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걸어 그 여자를 스쳐 나의 목적지로 향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우산이 내 시야를 가로막았다. 빗줄기로 젖어 모든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가, 우산을 쓰게 된 일순간 그분의 목소리, 아니 익숙한 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뭐해 오빠?" 어느 순간 마음에서 지워버렸지만, 분명히 너의 목소리였다.
"어... 나..." 나는 목소리를 잃은 듯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또 우연히 만나게 되었네. 정말 반갑다 오빠!" 그 시절과 같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녀가 말했다.
나는 비를 맞기 전까지 있었던 미지의 일과 우산을 쓰게 된 후에 벌어진 예상치 못한 만남들에서의 현실성을 찾지 못해, 한참 동안이나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너는 나의 대답은 원래 개의치 않았다는 듯, 그때의 좋은 기억들을 최대한 아름답게 서술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이나 듣고 있으니, 나 조차도 우리의 만남에는 아름다움만 가득했었구나 라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그맘때쯤 너는 내게 안아달라고 말을 건넸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네 너스레를 떨며 오랜만에 그녀를 안아보았다. 그 순간 세상은 옛날과 같이 우산 하나로만 이루어진 듯 느껴졌고, 그 속에서는 우리만이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입맞춤에 이르는 순간. 꿈은 그렇게 달콤함을 느끼려는 찰나에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알딸딸한 느낌의 꿈에서 깨어난 후, 진한 술자리 다음에 찾아오는 숙취와 같은 여운에서 한참을 헤매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문득 시계를 보니 30분가량의 시간이 흐른 상태였다. 꿈속에서 체험한 근 십 년 만의 너와의 포옹은 영원 같았는데,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었다니.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점심식사를 배부르게 먹고 나서도 쉬이 가시지 않았다. 삶의 허무함은 때로 허기짐을 없앰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내가 누군가에게 진지하게 건넸었던 조언이 인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뜬금없는 꿈과 함께 찾아온 허무는 나의 일상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녀와의 마지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너 머리가 안 좋은 거냐고, 스스로 자책해봐도 일순간 사그라들었을 뿐이었다. 꺼졌다고 믿었던 불씨 한 톨이 산불이 되듯, 이내 나의 내면의 모든 것들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그 날의 일들을 대충대충 해치울 수 밖에 없었고, 그 지리한 시간동안 생각한 해결책은 단 하나였다.
글을 쓰는 것. 내가 겪었던 일들, 그 순간의 감정들, 그때의 원망들. 나의 첫사랑이었던 너. 나에게 사랑으로 인한 행복이 무엇인지 처음 알려주었던 그 사람. 관계가 끝나고 난 후에는 지독하게 원망스러워 의미 없는 저주까지 내뱉게 만들었던, 그녀 그리고 나와의 관계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글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