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이나 촘촘함의 정도, 혹은 일렁임이나 시야에 나타난 표정 같은 것. 작게 보면 방기 된 약속, 크게 보면 군집화된 질서를 뜻한다. 결은 단일한 물질로 드러낼 수 없다. 모이고 섞여있어야 한다. 다수, 다양성, 경쟁, 공존, 조화, 교차, 가로지르기, 어울림, 결합 등의 방법을 동원한다.
결은 얼핏 한쪽으로 흐르기에 방향성을 가진다. 정체된 결이란 없다. 오히려 역동적이다. 시작과 끝, 열고 닫음, 일어서고 앉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갖기 때문에 지질학적이다. 3차원에서 4차원으로의 진화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내포하고 희망을 함유한다. 정지해 있는 사진을 연결하면 영상이 되듯, 각각을 연결하면 몸짓이 된다.
우리는 성베드로 광장의 열주에서 안으로 굽어 들어오는 압력을 느낀다. 하늘과 동서남북을 향하여 방사하고 싶어 하는 파르테논의 열주와는 다르다. 응집과 집중을 요구하는 이 가혹한 권력은 절대적 힘의 정교함을 상징한다. 한 치의 오차와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이 엄밀하고도 무거운 결은, 인간이 스스로를 속박하고 혹사하려는 자성의 몸부림이다. 어쩌면 결은 폭력적이고도 일방적이다.
그러나 자연은 어떠한가. 오히려 인간의 나약함과 무지를 뛰어넘어 거대한 우주질서의 규율에 복종하고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는 천진난만한 곡선과 침묵을 보라. 작게는 한여름 아스팔트 위에서 구불구불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자기만의 궤도를 부여잡고 성실하게 맴도는 은하계 사이를 난데없이 가로지르는 발칙한 혜성의 꼬리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사소한 인간의 희로애락을 돌어볼 틈도 없이 나른하다. 너무도 여유롭고 돌연한 이 자연의 결이라는 것은 자비롭다 못해 애처롭다. 그러므로 결은 또한 태평하고도 무심한 것이다.
우리가 공간에서 결을 느끼고 싶어 하는 이유는 마음의 산란 때문이다.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나약한 인간의 정서가, 내적 공명이 가득한 어떠한 리듬을 찾고 싶어 할 때, 내 앞으로 다가오는 수직부재들에서 순서를 더듬게 되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다르게 보이는 벽체 표면의 패턴에서 시각적 깊이를 발견하게 된다. 결은 위아래로 숨을 쉬고 좌우로 움직이다. 녀석을 포착하려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들어야 한다. 마치 땅을 헤집어 그 속에 묻힌 과거를 찾아내듯이.
결이란, 정지해 있는 화석처럼 어느 한 장의 석판에 가차 없이 박제되어 있게 마련이지만, 땅 속에 자신의 뿌리를 박고 태연하게 정지해 있는 고목처럼 노련하기도하다. 우리는 건축공간의 결이 갖는 연륜과 약속을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여기저기에서 가져온 재료들이라도, 보잘것없는 설계자의 의도 하나가 역청(瀝靑)이 될 수만 있다면, 결은 기꺼이 건축적 언어 속에 자신을 내어줄 것이다. 결은 언제나 자신의 연극에 대사를 부여해줄 관객을 찾기 때문이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 둥그런 구체(球體) 위에 느닷없이 돌출되어 돌아다니는 이 티끌 같은 생명들의 흔적이란, 표면을 긁고 훑어지나 가면서 만들어내는 가련한 상처 같은 것이라서, 비로소 애수와 연민 가득한 결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그렇게 본다면, 건축에서의 결이란 인간의 몸부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결은 완벽한 상생이다.
무심코 지나가던 길에서 나를 스쳐 지나가던 매화의 작은 잎들, 차갑게 버티고 선 노출콘크리트의 질감, 기름과 때가 스며들어 깊은 주름을 생성한 나무테이블의 표면, 엷은 피가 돌아 금방이라도 투명해질 듯한 아이의 발등, 그리고 잘라도 잘라도 끝없이 나의 죽음을 증거 하는 이마 위 머리카락까지 모두 자신의 따스한 손바닥으로 그 분주한 결들을 쓰다듬어보라. 혹시 아는가, 내밀한 비밀과 숨겨둔 고백을 드러내줄지. 자,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