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線)

by 리로

공간에서는 이것과 저것이 서로 맞닿거나 만난다. 완전한 단일재질이 홀로 독립하여 부유하는 경우는 없다. 구조를 갖춘 채 중력에 버티고 서려면 좋든 싫든 결합이 필수적이다. 조우하는 존재들 속에는 마침내 경계가 생긴다. 바로 그 틈에서 공간의 뉘앙스가 태어난다. 공간이 건축이라는 언어의 문장이라면, 그 틈은 언어의 종결어미다. 그것이 바로 선(線)이다.


건축에서의 선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 그것은 서로 다른 물질에서 생겨난 틈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기이한 양식이다. 때문에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상대방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결핍의 원초성을 드러내는 듯하다


우리는 일상의 곳곳에서 건축적 선을 목격한다. 벽과 바닥 혹은 천장이 만나는 곳, 주름이 접히고 찌그러진 부분, 부풀어 올라 도드라진 부분의 경계, 침식되어 생겨난 절벽의 테두리, 혹은 누군가의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건강하게 각이 진 턱 아래까지, 선이라는 것은 변화의 기점이고 혁명의 태동이다. 그것은 반대편으로 날아오는 공을 받아치려고 순간적으로 발꿈치를 꺾어 돌리는 테니스 선수의 격렬한 몸짓처럼 돌연하다. 그러므로 선이 생기는 곳에는 언제나 역사의 지층이 쌓이고 의식의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공간을 읽는 사람은 선 앞에서 쉼표를 찍을 기회를 얻는다.


깊고 두꺼운 선은 체념과 처절함을 나타낸다. 가늘고 날카로운 선은 예민함과 신중함을 상징한다. 선의 완만함에서 우리는 여유나 격정을 느낄 수 있고, 길고 짧음에서 응석과 포용을 감지할 수도 있다. 돌출된 선은 거만하고 함몰된 선은 영악하다. 선은 서로 간의 배려 없이는 합의되지 못한 계약서의 초안 같은 것이라서 언제나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의 관심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그 공간에서, 이야기의 앞뒤 맥락을 해석해 줄 이가 등장하였을 때, 서로 달리 만들어진 수많은 선들은 그들의 사연을 읍소하기에 바쁘고, 그 사연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자기 신체에 맞는 옷을 입을 수 있다.


가구의 문짝을 닫으며 생기는 틈의 균일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신경을 쏟는 인간의 집착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공간의 물질이 한결같은 자세를 지켜주었으면 하는 소망. 혹은 가족들이 둘러싸인 저녁시간에 깊은 소리를 내면서 갈라지는 수박의 표면은, 그것이 구체가 아닌 날카로운 선을 가진 깊은 계곡으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선이란 사람들의 의지이고, 성격이기도 한 것이다.


선이 얇은 남자, 선이 두꺼운 여자, 알고 보면 모두가 매력적인 것이다. 선이 요동치는 바다, 선이 독재하는 토양, 모두가 솔직한 것이다. 선은 결코 우열을 낳지 않는다. 오로지 오고 감, 혹은 원리를 남길뿐이다. 그러므로 선이란 모두가 애처롭고 아련하다. 그것이 공간에 대한 인간의 지향으로 남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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