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의 서랍
두 딸의 편지 읽는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어릴 때에는 아빠가 편지를 보내면 똑같이 좋아라 하던 두 딸들이 초등학교를 마치면서는 서로 다른 자세로 편지를 대합니다. 큰 아이는 편지를 받으면 바로 읽습니다. 받은 즉시는 아니더라도 그리 지체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작은 아이는 곧바로 읽지 않습니다. 며칠이고 몇 주고 편지를 놔둡니다. 읽는데 무슨 마음의 준비라도 필요한지 편지함 서랍에 계속 넣어둡니다.
얼마 전 저녁 먹는 자리에서 우리 가족이 3년 전 함께 여행했던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대화 중에 그 당시 아빠가 썼던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둘째는 그때 받은 편지를 아직까지 읽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 통 중에 한두 통을 안 읽은 것이 아니라 통째로 그대로 놔둔 것입니다. 편지를 받은 그대로 두기만 하는 이유를 물으니 대답은 '그냥'입니다. 누가 보낸 것이든 읽고 안 읽고는 편지를 받아 주인이 된 딸아이가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아빠는 보내는 사람일 뿐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니다. 작은 아이는 아빠 편지를 언제 읽게 될까요? 더 커서, 결혼해서, 아니면 아빠 나이가 되어서....... 처음에는 편지를 던져두는 것 같아 서운한 맘도 들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아빠 편지를 읽는 그 날을 기다리는 맛이 있습니다. 편지를 버리는 것은 아닐 테니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요.
받은 편지를 모아두는 스타일도 차이가 납니다. 작은 딸은 책상 서랍 한 칸을 정해서 엽서는 엽서대로 편지는 편지대로 분류합니다. 날짜별로 순서에 따라 모으고 종류별로 정리합니다. 큰 딸은 받은 편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받은 편지들이 책상 위나 책꽂이 한편에 있고 거실 구석에서 굴러다니기도 합니다. 아내가 청소하면서 편지를 발견했다면 큰 애 앞으로 온 편지일 것입니다.
편지를 받고 꼭 답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듯 받은 편지를 보관하는 문제도 받은 사람 마음대로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게 온 편지라고 해서 꼭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필기구를 여러 개 가지고 있다면 그중 몇 개는 사용보다 소유하는 것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있습니다. 카메라도 뭔가를 찍는 용도이지만 본연의 쓰임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가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쓸모 있게 쓰이기보다는 간직해 두는 것에 더 의미를 부여하는 물건은 취향이나 선호에 따라 여러 가지가 선택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온 편지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한두 통 정도라면 반갑고 궁금해서라도 읽겠지만 어느 정도 양이 쌓이면 꼭 읽는 것이 전부는 아닐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읽지 않은 편지가 읽은 편지보다 더 귀한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