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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규인 Aug 31. 2021

그리운 맛

이제  맛볼 수 없는 그 맛

 엄마의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곧 터질 듯하였다.


 “할머니 댁에서 다섯 밤 자고 다시 만나자.”


 내 나이 다섯 살 때 엄마는 동생을 낳으러 간다며 나를 외할머니 집에 맡겼다.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 낯선 공간에서 지내야 했던 나는 신을 신은 채 툇마루 구석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한참을 말없이 도라지를 까기에 몰두하다 칼을 내려놓았다. 두 손을 툭툭 쳐서 흙을 떨구고 대야에 담겨 있는 물에 대충 헹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고개를 빼꼼히 빼고 할머니의 뒷모습을 엿보았다. 잠시 뒤 할머니는 동그란  스테인리스상에 대접 하나를 내왔다. 그 대접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과 그 위에 달걀 프라이가 담겨있었다. 할머니는 마가린을 한 숟가락을 뚝 떼어 넣고 간장을 졸졸 따라 밥에 끼얹고 쓱쓱 비볐다.


 “자 아가 먹어보렴. 맛있을 거야.”


 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벌써 사십여전 일이라 생생히 기억할 리 난무하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입안에 절로 침이 고인다. 마가린의 고소함과 짭조름하던 간장 맛의 조화가 환상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엄마의 빈자리가 할머니의 음식으로 메워지는 순간이었다.

   

 그 다섯 살 아이는 서른 살이 넘자 임산부가 되었다. 한밤중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여보, 여보. 일어나 봐. 양수 터진 거 같아.”

 “얼른 준비해.”

 “일단 밥부터 먹자. 병원 가면 아기 낳을 때까지 아무것도 못 먹는데. 배고플 거 같아.”

 “이 시간에?”

 “응, 계란밥 먹고 가자.”


평소에도 끼니를 거르지 않는 버릇이 있어서일까? 아기를 낳으러 가기 전에 밥을 꼭 챙겨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아기를 잘 낳으려면 힘을 줘야 할 텐데 밥을 먹고 기운을 내야 하지 않겠는가. 대충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식탁에 대접 두 개가 놓여있었다. 나와 남편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허겁지겁 참 맛있게 한 그릇 뚝딱 비웠다. 그리고 곧장 집 앞에 있는 산부인과 응급실로 향했다. 역시 예상대로 수술을 대비하여 내게는 금식령이 떨어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관장약을 몸속에 넣자 약효가 얼마나 세었는지 나의 장은 순식간에 모두 비워졌다. 음식물 섭취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빈속이 되었지만, 입안에는 짭짤 고소한 맛이 기분 좋게 남아있었다.

     

 뱃속에서 계란밥을 맛보았을 아기가 세상에 나온 지 벌써 십여 년이 흘렀다. 이 아이는 자주 아침으로 계란밥을 주문하곤 한다. 마가린이 지방이 함유되어 있다길래 참기름을 넣어주기는 하지만 고소함과 짭조름한 맛은 비슷하다. 내가 먹던 그 맛이 아이에게 대물림되었다. 내게 그 맛을 처음 맛보게 해주었던 외할머니는 17년 전 이렇게 가을 찬바람이 시작될 즈음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는 할머니표 계란밥을 더 이상 맛볼 수가 없다. 할머니 살아있을 때 시집가라고 그리 당부했는데 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해가 지나서야 결혼을 했다. 결국 할머니한테 내 손으로 따뜻한 밥 지어드리지도 못했다. 내 가느다란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며 이 손으로 어찌 밥을 해 먹겠냐며 걱정했는데, 이제 나는 투실투실한 손으로 이것저것 뚝딱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상다리가 휘어져라 한 상 차려놓고 할머니한테 자랑하고 싶지만 기회가 없다. 


대부분의 음식 속에는 만든 사람의 정성과 사랑이 담겨있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쓴다 하더라도 마음이 들어가지 않으면 맛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 음식은 겉 모양새는 번듯하더라도 먹는 이로하여 금 감동을 주기에부족하다. 겉이 번지르하지는 않지만 마음의 조미료가 쳐지면 소박한 음식일지라도 그 맛은 혀를 감 싸돌고 입안에 한참을 남는다.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음식을 만들어준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계란밥처럼 오랜 시간 입 안에 맛과 향이 남아 여운을 줄 수 있는 음식, 그런 음식을 만들어 나누고 싶다. 어제가 바로 할머니 기일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외할머니의 계란밥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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