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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규인 Sep 05. 2021

갑옷 없이 전쟁에 나온 것 같아

 보험 없이 렌터카 운전하기란

친정어머니의 칠순을 맞아 떠난 여행이었다. 제주 2일 차 아침에 부산을 떨어 수요미식회에 나왔던 해장국 맛집에 들렀다. 대기시간 30분 만에 해장국 뚝배기를 마주하며 운이 좋았다고 시시덕거렸다.


소화시킬 겸 들른 협재 바다. 나는 햇빛을 받아 에메랄드 빛을 발하는 협재 바다를 보고 싶었으나 내 눈앞에는 뿌연 바다와 비양도가 있을 뿐이었다. 하필 날씨가 좋지 않아 운이 나빴다며 투덜거렸다. 이때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제주 협재


그리고 오름에 한 번도 오르지 않으셨다는 부모님을 모시고 금오름으로 갔다. 운전을 맡았던 동생은 주차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애먹다 겨우겨우 자리를 찾았다. 점심에는 일부러 주차가 불편한 맛집 따윈 포기하고 순전히 주차장 넓은 곳을 선택했다.


아버지는 천지연폭포를 가보고 싶어 하셨다. 배려심 많은 동생은 폭포 매표소 앞에 일단 우릴 내려주었다. 표를 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동생 이름이 떠있는데 직감에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누나 사고 났어."

"몸은 괜찮아?"

낮은 목소리고 말했다. 이럴 땐 나란 인간 참 침착해진다.

"응"

"그럼 됐어. 그리 갈게. 기다려."


천지연폭포의 주차장의 주차선은 마치 헤링본 무늬처럼 되어있었다. 동생이 뒤쪽 차량이 주차를 마친 걸 보고 후진하는데 뒤쪽 차량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후진하다 사고가 난 것이다.


상대 차량은 손상이 없었는데 우리 쪽 차만 움푹 파였다. 부모님은 태연한 척하셨지만 사고보다 부모님이 더 걱정되었다. 평소 혈압이 높아 약을 드셨는데 최근 갑자기 혈압이 솟구쳐 약을 3배 이상 늘렸기 때문이다. 


보험회사 직원은  신고 후 10분 내로 도착했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살피더니 사진 몇 장 찍고 차를 이동시키라 했다. 실상 차를 빼보니 움푹 파였던 범퍼는 펴졌고 보일 듯 말듯한 가는 실선만 남았다. 그는 한마디 말을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 시간부로 보험은 소멸됐습니다."


소멸, 그러면 무보험으로 다녀야 하는가. 동생은 다급히 렌터카에 보험 재가입이 되는지 문의했지만 불가능하다고 했다.


"괜찮아. 천천히 조심히 다니면 되지."


모두 주문을 외듯 반복해서 말했지만 동생은 바짝 긴장한 채  방어운전을 했고 올레시장 주차장에서는 최대한 사고 위험이 적은 구석 자리를 찾아 주차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생은 십 년 넘게 운전했는데 오늘은 마치 어제 초보운전자처럼 바짝 힘이 들어가 보였다. 급기야 날이 어둑해지자 중얼거렸다. 


"갑옷을 벗고 전쟁에 나온 것 같아."


부모님이 일찍 잠자리에 드시자 이 녀석은 맥주 한 캔을 들이켰다. 20년 만에 가족여행이었는데  마음이 오죽할까 싶었다.


다음날 아침 부모님은 주차장에 다녀오셨다고 했다. 누가 밤새 차를 긁어놓진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다고... 얼마 전 제주에서 무보험 사고로 몇 천만 원을 보상했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대로 남은 이틀을 보내긴 힘들 것 같아 기존 렌터카를 반납하고 새로 다른 회사의 렌터카를 빌리기로 했다. 물론 남은 이틀간의 비용은 환불받지 못한 채 고스란히 날렸다.


공항 근처에서 새로 렌터카를 빌리고 우리는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사람처럼 다시 들뜬 기분을 장착했다. 그제야 비로소 동생도 다시 갑옷이 생겼다며 어깨가 펴졌다.

 


차를 반납하고 새로운 렌터카를 빌리기 위해 공항에서 셔틀버스를 타다가 우리 가족은 한참을 웃었습니다. 보냉 백하나에 커다란 슈퍼마켓 비닐봉지를 들고 렌터카 픽어 버스에 올랐거든요. 남들이 보면 넷이서 달랑 이거 들고 제주여행 온 줄 알겠지요? 지나고 보면 이런 게 여행의 묘미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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