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동물애호가입니다만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노천명 <사슴>
2023년 하반기 불난이도였던 수렵면허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무사히 건강검진, 정신건강검진, 전과조회까지 통과해 8월 수렵면허 1종을 취득하였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지난 20년 간 국제문화예술 교류를 빌미로 전 세계 50여 개 도시를 방문하고 또 살아봤건만 눈앞에서 야생동물을 접할 기회는 드물었습니다. 그러던 중 20년 지기 친구가 국립생태원 전시기획실로 옮겼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MBTI가 J인지라 방문계획을 세우려고 관련 검색을 하다가 야생생물관리협회(KoWAPS)를 알게 되었습니다. 멸종위기 야생동식물을 체계적으로 보호관리한다는 취지에 감화되어 이왕 수렵면허준비까지 시작했습니다. 집중력 향상을 위해 사격을 즐겨하던 터라 공기총과 더불어 산탄엽총까지 범위를 확장하면 좋겠다 싶었지요. 야생동물은 지금까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영역이라 새로운 지평이 열렸습니다. 무자비하게 동물을 사냥할 거라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환경부가 지정하고 전국적으로 지역 순환수렵장이 열리는 때만 수렵이 가능합니다. 사전 포획승인신청으로 잡을 수 있는 개체수가 정해져 있어 웬만한 동물전염병 (광견병, 조류독감, 아프리카돼지열병 등)이 없는 평소에는 클레이 사격장에서 움직이는 원반표적이나 쏠 수밖에 없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인간에게도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지요. 리모트 근무가 디폴트가 되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만 사무실에 모여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패션에 있어서도 편한 운동복이나 운동화를 신고 라운지웨어 혹은 원마일웨어가 대세로 자리 잡게 되었고요. 휴대폰 소음이나 앞뒷사람을 신경 써야 하는 영화관보다는 홈시어터를 꾸미거나 VR 기기로 내 방에서 OTT 서비스를 즐기는 것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소위 한류 콘텐츠에 유난히 좀비물이 많아 숨죽이고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영화 <부산행>의 도입부는 다소 충격적이었습니다. 실제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발생한 치명적인 만성소모질병(CWD, Chronic wasting disease)은 '광록병'이라 불립니다. '광우병'에 걸린 소처럼 뇌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눈이 붉게 변해서 침을 흘리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증상을 보여 '좀비사슴'이라고 부릅니다. 원인은 프리온 (prion) 변형단백질로 감염된 부위 (뇌, 갑상선, 척추, 내장, 편도선 등)이고 고기를 먹더라도 특수 부위를 섭취하면 감염위험이 높습니다. 인수공통감염병으로 알려진 브루셀라증 (Brucellosis)은 우제류 (짝수 발굽을 가진 포유류)에서 주로 나타나며 함부로 섭취 시 장기를 공격하고 뇌수막염, 유산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고라니는 수렵은 할 수 있지만 먹어서는 안 되는 야생동물 32종입니다. 특히 고라니의 피나 간은 기생충이나 중금속 오염 가능성이 커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고요.
고라니, 노루, 사슴 친구들은 모두 사슴과 (Cervidae) 인지라 얼핏 보면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가나다순으로 먼저 고라니는 암컷과 수컷 공통적으로 송곳니가 드라큘라처럼 길게 돌출되어 있어 무서워 보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예쁘지 않으면 거부감과 편견을 갖기 십상이지요. 뿐만 아니라 울음소리가 마치 사람의 비명소리 같아 밤에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곤두설 정도입니다. 식성이 좋아 배추, 상추, 고추, 콩 등 밭작물을 무자비하게 파먹어 국내에서는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되었기에 수렵이 가능합니다. 전 세계적으로는 멸종위기종인데 아이러니하지요. 아마도 이런 특성 때문에 영화에서 인간의 목덜미를 물어 전염병을 옮기는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반면 노루는 송곳니가 없고 엉덩이는 흰색입니다. 결대로 찢어 기름장에 찍어먹는 복슬복슬한 노루궁둥이 버섯을 떠올리면 대략적인 생김새가 그려질 겁니다. 꼬리는 매우 짧아서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예로부터 육질이 연하고 감칠맛이 있어 고기를 구워서 먹거나 육포 등으로 먹었으며 피와 뿔은 한약재로 쓰여 왔습니다. '인간을 위한 동물'이란 대목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는데 과거 식량이 부족했던 시절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멸종위기 1급 야생동물이자 천연기념물인 사향노루는 뿔이 없는데 송곳니가 길게 나와있어 자칫 고라니와 헷갈릴 수 있으니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주의를 요합니다.
사슴은 송곳니가 없고 꼬리가 긴 편입니다. 몸에 흰 반점이 있고 좌우대칭의 뿔이 멋지게 발달하지요. 일반적으로 수컷만 뿔이 생기는 종이 대부분이지만 순록처럼 예외도 있습니다. 1년마다 다시 자라나서 희소성으로 가격이 인삼에 비견되는지라 요즘은 화학요법으로 암컷도 뿔이 생기게 만듭니다. 멸종위기 1급 야생동물인 대륙사슴 (토종 꽃사슴)은 한국전쟁 후 남획으로 사라졌습니다. 1980년대 일본에서 들여와 방사했던 외래종 꽃사슴과 생김새가 유사해 배설물을 통해 유전자분석을 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외래종 꽃사슴이 사람을 공격하거나 한라산 묘목을 뜯어먹는 등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어 2014년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된 바 있습니다. 유해성을 가리는 기준이 사람이라는 점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