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비율 파운드케이크(pound cake)

난이도 ★

by YJ

부산의 공기는 습하면서도 달콤했습니다. 한달살기를 위해 내려온 이곳, 영생교육원의 베이킹 클래스는 서울의 사무실과는 다른 종류의 소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세 번째 시간이라 다소 경계가 풀어진 듯했습니다. 오늘 주제는 파운드케이크. 기본 재료를 같은 무게로 섞어 만드는 이 레시피처럼, 여기 온 사람들도 무척 단조로운 삶을 살아왔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밀가루, 설탕, 버터, 계란을 1:1:1:1로 섞어서 틀에 붓고 오븐에 구워내는 것이 전부입니다. 재료를 1파운드씩 넣어 만들었다고 해서 '파운드케이크(pound cake)'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모든 재료는 냉장고에서 꺼내 두어 실온이어야 하고, 조금씩 추가하고 자르면서 섞어야 글루텐(gluten)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160~180℃로 예열한 오븐에 40~50분간 굽다가 꺼내 젓가락으로 찔러 반죽이 묻어 나오지 않으면 완성입니다. 취향에 따라 코코아가루나 말차가루를 넣어 마블링을 만들 수도 있고, 표면에 글레이즈, 크림치즈, 가나슈 등으로 아이싱 하면 화려하게 변신할 수 있습니다.


파운드케이크는 이미 집에서도 여러 번 만들어 봤던 터라, 반죽을 오븐에 넣고 케이크가 구워지는 동안 휴대폰으로 작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Yeah, check it

밀가루, 설탕, 버터, 그리고 계란
1대 1대 1대 1, 완벽한 균형
Rich and heavy, you know how we do it
Let's bake it

오븐 온도는 170, 예열은 필수
준비된 볼 안에 버터를 녹여, 실수 따윈 없어
하얀 설탕을 부어, 서걱거리는 소리
크림처럼 변할 때까지 저어, 이게 본질의 고리
계란은 하나씩, 분리되지 않게 조심해
내 라임처럼 부드럽게 섞여, 리듬을 타네
체 친 밀가루를 덮어, 마치 눈이 내린 듯해
가볍게 가로질러, 덩어리 없이 매끈하게

Pound it, Pound it, 묵직한 이 맛
입안 가득 퍼지는 버터의 향, 멈출 수 없지
파운드케이크, 1파운드의 마법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져, 클래식의 정석
That's that Pound Cake, yeah

틀에 담아 바닥에 탁탁, 기포를 빼
가운데 선을 그어, 예쁘게 터지게 해
오븐 문을 닫고 기다림의 미학을 배워
노릇하게 익어가는 색깔에 내 열정을 채워
꺼내자마자 풍기는 그 진한 향기에 취해
식혀야 더 맛있어, 조급함은 뒤로 미뤄 둬
한 조각 잘라내면 촘촘한 그 단면
커피 한 잔 곁들이면 여긴 바로 낙원

레몬 제스트를 넣으면 상큼함이 배가 돼
초코 칩을 뿌리면 달콤함이 더해지네
어떤 재료든 다 받아주는 이 든든함
나의 음악도 이 케이크처럼 묵직하게 남길 원해

Pound it, Pound it,
묵직한 이 맛
입안 가득 퍼지는 버터의 향, 멈출 수 없지
파운드케이크, 1파운드의 마법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져, 클래식의 정석

Yeah, slice it up
모두와 나눠 먹는 묵직한 행복
It's the classic
Pound cake.
Peace.


갑자기 이 씨가 훅 들어오더니 자신의 아들 이야기를 꺼내며 내게 살갑게 굴었습니다.


"우리 아들이 군대 다녀와서 27살인데 곧 졸업이에요. 혹시 회사에 자리가 있으면 인턴이 가능한가요?"


"면접만 통과한다면 전공 불문하고 3개월 가능하고요, 급여는 정직원과 동일하게 지급하고 있습니다. 실력이 출중하면 박사 과정까지 지원하면서 정직원으로 전환하고 있어요."


"어머나! 그럼 인턴십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제가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만 바라보고 살고 있어요, 언니"


그 가식적인 '언니'라는 단어에 내 마음의 빗장을 열어버린 것이 실수인지도 모릅니다. 그 후로도 그녀는 자신의 약점을 털어놓으면서 더 친근하게 접근했습니다.


그날 이 씨는 실습 후 나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하겠다면서 60년 전통의 어느 돼지국밥집으로 안내했습니다. 노포 특유의 깊고 진한 체취가 그때 걸쳤던 코트 속 깊숙이 배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취향은 묻지도 않고 소주 한 병을 시키더니 자작을 하며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여기 베이킹 강좌를 9년째 듣고 있다면서, 강사 배 씨가 오른손 엄지를 잘라 군대를 안 갔다는 무쓸모한 남의 이야기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년 전 난소암으로 자궁적출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다가 머리카락이 빠졌다는 아주 비밀스러운 자신의 상처까지 털어놓았습니다. 그러고는 내 앞에서 그 보라색 베레모를 벗어 보였습니다. 아기 같은 두피가 드러났고, 그녀는 평소 가발을 쓰고 다닌다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내 소중한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라면 다르겠지만, 겨우 세 번 만난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사랑 고백도 이런 식으로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감정을 꺼내 놓는 사람보다,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느낄 '무게'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아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의 날것 그대로를 마주할 때, 듣는 이는 심리적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의 깊은 상처를 받아들이는 일은 단순히 눈과 귀를 빌려주는 행위를 넘어, 상대의 감정적 부채를 함께 짊어지는 일이 되곤 합니다. 상대방의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쏟아낼 때, 듣는 사람은 이를 거절할 수 없는 '공감의 인질'이 된 것 같은 불쾌함에 휩싸입니다.


이 씨의 고백이 이어질 때, 나는 귀에서 피가 터지는 듯 우두커니 앉아 고문과 진배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 음악에 귀를 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여과 없이 전이되는데, 당시 내 안에는 이를 처리하거나 비워낼 여유가 없었습니다. 고백을 하는 사람의 면전에서 "나 지금은 듣기 힘드니까 제발 그만해요"라고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특히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나의 거절이 또 다른 상처가 될까 봐, 혹은 냉혈한 T로 오해받을까 싶어 원하지 않는 경청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버텨내야 한다'는 생존 본능만 남았습니다.


이 씨의 이야기는 '구원'을 원하는 뉘앙스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이유가 없기에 무거운 부채감이 느껴졌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라는 고민이 강박으로 변할 때, 대화는 더 이상 풀지 못하는 숙제를 안고 쩔쩔매는 고역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결국, 이 씨의 고백은 내 마음속에 단단한 '회피의 벽'을 세웠습니다.


상대에게 진심을 고백하기 전, 그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빈자리가 있는지 먼저 살피는 것이야말로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1:1:1 황금 비율을 유지하는 파운드케이크야 말로 인간관계의 기본이 되는 레시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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