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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대소동

열쇠 절대 지켜!

by 영오

포르투갈에서 살면서 제일 등골이 오싹한 일은 열쇠를 집안에 두고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한국이야 디지털 도어록이 보편화되어 있어서 열쇠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유럽은 아직까지 여러 가지 이유로 열쇠가 대세다.

처음 왔을 때는 적응이 안 돼서 에어비앤비에서 문을 닫았다가 다행히 호스트가 여분의 키를 보내줬던 적이 있었고 이 집에 살면서도 열쇠를 놓고 나왔는데 다행히 다른 가방에 열쇠가 하나 더 있어서

위기를 넘겼었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로 열쇠를 집안에 두고 가차 없이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내 심장은 발밑을 지나 지하 3층까지 떨어진 느낌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후회뿐.

아무리 가방을 뒤지고 또 뒤져도 그곳에 열쇠는 없었다. 시간을 5분 전으로만 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챙긴다고 챙겼는데, 늘 신발장위에 올려놓고 했는데도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일단 정신을 다잡고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늘 이럴 때 전화는 연결이 안 된다.

그래서 1층 로비로 가서 그곳에 굴러다니는 열쇠수리공 찌라시를 하나 집어 들고 와츠앱으로 문자를 보냈다.

나 어디 어디 사는데 문을 열어줄 수 있느냐. 하고.

하지만 토요일 오후여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행히 시간이 돼서 집으로 와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고맙던지.

별기대하지 않았던 열쇠수리공에게서도 문자가 꽤 빨리? 도착했다.

문 여는 것 오늘 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나는 재빨리 대략적인 비용과 시간을 물어봤다.

출장비 30유로에 수리비는 250유로부터. 그리고 한 시간 반정도면 올 수 있다고 했다.

문을 이렇게 열어본 적이 있는 또 다른 지인에게 물으니 7,8년 전에도 몇백 유로 들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 문하나 따는데 몇백 유로가 날아갈 판이었다.


쇼핑을 나왔던 지인부부는 생각보다 빨리 와줬다. 그리고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면서 일단 자기네가

한번 열어본다는 것이었다. 문을 닫아서 그냥 잠긴 것은 책받침? 비슷한 걸로 열쇠 잠금장치를 밀면

열린다는 것이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런 일들이 많아서 민간요법 같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열쇠수리공이 와서 문을 열어주는 걸 어깨너머로 보고 자기네들 나름의 방법을 찾은 것일 테지.

하지만 지인이 가져온 책받침 비스무리한게 그다지 효과를 못 내서인지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 아파트 동대표 같아 보였던 아저씨를 찾아 나섰다.

늘 아파트 주위를 맴돌며 이것저것 챙기고 사람도 좋아 보였던 아저씨랑 평소 인사라도 하고 지냈던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던지. 알고 보니 그 아저씨가 우리 집 바로 아랫집에 사시는 게 아닌가.

우리는 아저씨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했고 아저씨는 흔쾌히 본인 비장의 장비를 들고 와주셨다.

그 비장의 장비라는 것은 바로 엑스레이필름이었다. (대체 어디서 구하셨나 싶은..)

그걸 문 틈새에 끼고 열쇠 잠금 부분을 몇 번 강하게 쓸어주자 기적적으로 문이 열렸다!!

뭔가 잘 휘어지면서도 찢어지지 않는 것이 필요했는데 엑스레이필름이 아주 딱 맞는 장비였다.

지인남편이 포르투갈사람이라서 둘이서 한참을 담소를 나누시더니 아저씨는 쿨하게 내려가셨다.

눈물 나게 고마웠는데 "Muito Obrigada!"밖에 못한 게 아쉬워서 다음날 초코파이와 도시락김을 사서

가져다 드렸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큰일이 되나 싶지만 이곳에서는 아직도 이런 일들이 일상이다.

가족수만큼 열쇠를 복사해서 들고 다니고 한두 개는 지인에게 맡겨서 이런 비상사태도 대비하는 것이 삶의 지혜가 되는 곳. 한바탕 혼쭐이 나고서 열쇠를 신발장이 아니라 아예 현관문 손잡이에 걸어두었다.

지인도 아예 집안 열쇠구멍에 꽂아둬서 나갈 때 잊어버릴 수 없도록 한다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한고비를 넘기고 나니 내가 오늘 열쇠를 가지고 집을 나섰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내가 잊지 않고 열쇠를 챙겼다는데서 오는 안도감과 편안함.

몇십 년은 후퇴한 것 같은 삶인데도 심플한 것들이 주던 행복을 다시 찾은 장점도 있다.

이제 당분간은 열쇠 챙기는 걸 잊어버리지는 않겠지.

포르투갈에 여행을 오신다면, 열쇠는 꼭 들고 다니는 가방에 잘 넣어두시고 챙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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