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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맞은 명절

달은 다 똑같구나

by 영오

한국은 추석연휴지만 여기는 그냥 평범한 10월 초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명절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한국 가족들에게 전화를 건다.

그럼 모두들 여기는 명절음식이 있는지, 가족들을 못 봐서 쓸쓸하지는 않은지

물으며 괜스레 안쓰러워한다.

나 역시 가족들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상대적 행복감이랄까 그런 마음이 든다.

한국에 있을 때 명절마다 대단히 힘들었던 것도 없는데

뭔가 가슴 한 편이 답답해져 오는 명절증후군 같은걸 안 겪어도 되니

솔직히 이곳에서 명절마다 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왜, 언제부터 명절이 이런 의미로 전락을 했을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어렸을 적부터 명절은 그리 재미있는 날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친척을 만나면 꼭 공부는 잘하는지, 몇 등하는지 물어보거나

하기 싫은 노래나 춤을 해보라며 시키거나, 또 다른 친척아이와 비교를 당하는 날이라 싫었다.

물론, 세뱃돈이나 용돈을 받는 기쁨도 크긴 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도 사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을 가니 취업걱정을 하고, 직장을 가니 결혼 걱정을 하고,

결혼을 하니 애 낳으란 잔소리를 하고.

그렇게 매번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듣는 게 명절의 디폴트가 되어버렸고

결혼하고 나서는 명절노동까지 가세해서 더욱 우울한 날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명절노동에서는 많은 혜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명절은 그냥 정신적으로 힘든 날이라는 게 온몸과 마음에 각인이 되어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와서는 명절을 지내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했다.

또한 외국에 나와있다는 핑계로 명절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도

해외생활이 주는 큰 장점?이었다.

내가 너무 가족의 정을 과소평가하는 냉혈한 같은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명절이 지긋지긋한 한국사람들 몇몇은 공감을 할 것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가족 간의 유대가 끈끈한 편이다.

그래서 주말이면 가족끼리 모여서 식사를 하는 집들이 많다.

주로 집에서 어머니들이 직접 음식을 해서 자식들에게 대접하기도 하고

식당에서 만나서 점심이나 저녁을 즐긴다.

축구경기라도 있는 날이면 다 같이 모여서 축구경기를 즐기고 동네 식당에서

같이 경기를 보기도 한다.

동네에는 곳곳에서 나이 든 노인들과 중년아저씨들이 카드게임을 즐기거나

맥주 한잔을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물론 이곳에도 고부갈등도 있고, 가족 간의 갈등도 있고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나 있는

반목과 불화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가족들과 소소한 행복을 나누며 조용히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크게 목소리 높여 토로해야 할 불만이나 갈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삶에 대한 기준이 높지 않아서인지, 서로에 대한 선을 가족끼리도 잘 지켜서인지

자주 어울리고 어울릴 때도 늘 즐거워 보이는 게 부럽기도 하다.


그렇게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나는 한국에 있을 때 그러지 못했는지 생각해 본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각자의 삶에 간섭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족이니까 저렇게 살면 안 되지, 조언을 해줘야지, 고쳐줘야지 하면서 훅훅 들어가지만

사실 각자의 인생은 본인들이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왜 꼭 말 한마디를 얹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걸까?

그것도 정말로 오래간만에 얼굴을 보는 명절에.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사람을 만난 자리에서는 보통 그간의 안부를 묻고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요즘 재미있는 건 뭔지, 삶의 변화는 뭔지 어려움은 뭔지 묻고 답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가뜩이나 사는 게 힘든 사람을 두고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는 건

결국 내 생각만 하는 짓이다. 내가 아니라 상대를 조금 더 바라봐 주는 건 어떨까.

내 얘기는 좀 접어두고 상대의 이야기를 조금 더 궁금해해 주는 게 배려고 진짜 사랑이 아닐까.

진짜 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를 좀 내려놓고 내 안에 다른 이들을 채워가는 일은

생각보다 보람 있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다음 명절은 마음에 조금 더 사랑을 채울 수 있는 날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하늘을 보니 정말로 커다란 달이 두둥실 떠서 강물을 비추고 있었다.

달은 이곳의 달이나 한국의 달이나 같을 테니 그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었다.

내년 명절에는 우리 모두 다 함께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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