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드는 기계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열정은 폭력이다.

by 이동수

집에서 20분이면 가는 대학에 입학한 나는 여자라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앉아 강의를 듣는 낯선 경험을 했다. 아이들이 입고 오는 옷, 날아오는 화장품 냄새 뭐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게 없었다. 원하는 과가 아니었기 때문에 입학만 하고 그만 둘 생각이었던 나는 그 신기한 경험 그리고 나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듯 친절한 선배들의 끌림에 하루하루 대학 생활을 연장하고 있었다. 강의 시간보다는 강의 외 시간에 배우는 것이 더 많았고 더 재밌었다. 그나마 강의 시간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내가 대학에 입학 한 1987년도는 전두환 정권 시절로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실이 퍼지고 있었고, 정권의 폭력성에 지친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 선두에 대학생들이 있었다. 나 역시 학교 안에 있던 허름한 소강당에서 광주 민주화운동 때의 모습을 촬영한 비디오를 봤다. 비록 화질은 좋지 않았지만 광주에 저질러진 폭력성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음에 적잖이 당황했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선배를 따라다니기 시작하며 선배가 권하는 책들을 읽었다. 또 정권을 규탄하는 집회에 참석하고 이야기를 들으며 난 분개했다. 그렇다고 내가 일부 선배들처럼 또는 TV에 나오는 극렬 빨갱이(?)는 아니었다. 그런 일을 할 만큼 내 배포와 능력은 못 되었다. 그저 배운 지 얼마 안 되는 담배를 피우며 뜻도 모르는 말을 쓰며 흥분했을 뿐이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는 일부 학생들만이 것이 아니라 전체 학생들에게 퍼졌고 우린 자연스레 수업 거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학생이 수업을 거부한다는 것은 학생의 의무를 내팽개치는 것이므로 안 된다는 몇몇 교수님들의 호소와 협박이 있었지만 우린 수업 거부를 결의했고 이어서 시험을 거부했다. 그런데 수업 거부가 몇 차례 진행되자 우리가 관성적으로 수업 거부하는 것은 아닌지, 수업 거부가 과연 효과적인지 등에 대해 회의감을 갖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수업 거부에 동참할 것인지를 묻는 투표를 했다. 누구도 선뜻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순간 내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희보다 잘 안다는 건방짐 그리고 뭔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 하여간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나서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앞에 나가서 우리의 이 투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시대와 역사를 들먹이며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그러 얘기는 이미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내 얘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난 이 아이들의 무표정, 무기력을 깰 뭔가 센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희들은 어쩜 이런 일에 관심이 없니? 그리고 조금 있다 결정할 때만 분위기 봐서 손을 드니? 너희들이 손 드는 기계니?” 하고 말했다. 그러자 지나친 흥분으로 앞뒤도 못 가리던 내가 느낄 수 있을 만큼 아이들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 순간 멈춰야 했지만 나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한 바탕 더 조악하고 상처 주는 비난을 한 후 의기양양 자리로 돌아왔다. 나의 무지와 폭력은 우리가 그렇게 혐오했던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과 다름없음을 깨달은 것은 한참이 지난 후이다. 자신만 옳고, 자신만 알고 다른 이들은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므로 자신만 따라오라는 생각과 행동이 곧 폭력임을 삶을 통해 배운 후 그때 그 날뛰는 망나니를 따뜻하게 대해 준 동기들이 고맙다. 30년이 넘은 지금도 동기들을 만나면 가끔 이 이야기를 한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지만 내가 들어갈 쥐구멍은 없으므로 그저 웃음으로 미안함을 표현할 뿐이다.

가끔 그 당시의 나처럼, 전두환 정권처럼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자신만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진보든 보수든 어디에나 있는 것 같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인정 없이 열정적으로 선동하는 모습은 어떨 때는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30년 전 내 동기들이 내가 지금 느끼는 공포를 느꼈겠구나 싶다. 상대를 비난하기 전에 상대를 인정하고 내 주장을 하기 전에 상대의 주장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좀 더 자주 보고 싶다. 폭력이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해서 나타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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