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시인입니다.

칭찬은 삶의 여유를 갖게 한다.

by 이동수

대학교 때 시창작론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수업을 신청한 이유는 간단했다. 과제 부담이 적고 친구들이 신청했기 때문이었다. 단언컨대 시 창작에 대한 관심은 1도 없었다.

강의 시간이 되자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앉아 있었고 교수님의 시 창작 이론을 강의가 한 동안 이어졌다. 재미없었다. 그냥 내 선택을 후회하며 어떻게 남은 시간을 보내나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지겨운 강의를 마치며 교수님은 과제를 내주셨다. 다음 시간까지 시 한 편을 지어오라고 하셨다. 앞으로 수업은 우리가 창작해 온 시를 감상하며 진행하겠다는 말씀과 함께. 이건 아니었다. 과제를 안 내주고 재미있다고 해서 신청한 건데... 과제도 내주고 재미도 없다니...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거였다. 강의실을 나오며 우린 너나 할 것 없이 후회했고 먼저 듣자고 한 놈을 성토했다. 그러나 선택을 물릴 수는 없었다. 결국 우리의 투덜거림은 과제로 집중됐다. 그러나 투덜거린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1주일이라는 여유와 시 한 편 못 쓰겠나 하는 자만심으로 우린 서로를 위로했다.

이 과제를 며칠 동안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해봤자 막막하기만 했다. 다행히도 내 주위 녀석들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나 나나 딱 그 수준이었다. 결국 강의 전날까지 난 시를 짓지 못했다. 그렇다고 명색이 대학생인데 과제를 안 해가서 수십 명의 사람들 앞에서 “못 해왔습니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강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갑갑했다. 시가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쓴단 말인가? 고민하다 시인의 시를 흉내 내기로 했다. 적어도 시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듣지 않겠지 싶었다. 이왕이면 유명한 시를 내면 되겠구나 싶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흉내 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물푸레나무 잎을 적시는 아침 이슬처럼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는 지은 시(?)의 전부다. 난 만족스러웠다. 못 낸 애들이 태반이었기 때문에 난 그들보다는 낫다 싶었다. 교수님은 들어와서 우리들이 낸 시 같은 것들을 천천히 읽어보시고 몇몇을 옆으로 빼놓으셨다. 우린 직감적으로 그것들이 이번 강의 시간의 교재임을 알 수 있었다. 제발 내 것이 선택되지 않기를 바랐다. 분명 성의 없을 뿐만 아니라 표절한 나쁜 예로 비판받을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선택 시간이 끝나고 교수님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실물화상기에 첫 번째 시(?)를 올려놓았다. 내 것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이제 욕먹을 일만 남았구나. 어떻게 사과, 변명을 해야 하나... 아무튼 머리가 띵했다.

그런데 스크린에 내 시(?)를 띄운 교수님은 전혀 예상 못한 말씀을 하셨다. 이 시를 쓴 사람은 “시인입니다.”라고 하셨다. 시가 뭔지도 모르고 유명 시인의 시를 노골적으로 표절한 나에게 시인이라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나를 반어적으로 비난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교수님은 계속해서 지금 등단해서 시인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사람의 시보다 훨씬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라고 하셨다. 모두 “왜?”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 역시 “왜?” 할 뿐이었다. 교수님은 내 시를 천천히 읽으시면서 비록 ‘님의 침묵’을 차용했지만 “물푸레나무 잎을 적시는 아침 이슬”이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좀 더 자신의 재능을 믿고 주변을 더 관찰하고 사랑한다면 한국 시단을 이끌어 나갈 훌륭한 시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물론 난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물푸레나무’를 본 적도 없었고 내게 그런 재능이 있다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수님의 말도 안 되는 칭찬이 남은 ‘시창작론’ 수업을 즐겁게 기다리게 했으며, 그 후 마음에서 신호가 올 때 겁 없이 뭔가 쓸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분명하다.

지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신감이 부족한 학생들을 너무 심한 잣대로 평가하고 질책하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물론 저 아이를 위한 거야라고 합리화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이를 더 위축시켰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사실 질책받을 아이들 대부분은 이미 자신을 질책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꾸 칭찬을 해줘야지 다짐하지만 칭찬보다 질책을 더 많이 하는 걸 보면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칭찬이나 질책도 습관인데 어느새 나쁜 습관이 들어버렸다.

칭찬이 고래도 춤추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수님의 칭찬이 나에게는 시를 즐길 수 있게 해 준 것처럼 오늘 내가 하는 칭찬이 지친 아이들에게 잠깐의 휴식이라도 줬으면 좋겠다. 오늘은 평소보다 한 번 더 칭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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