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받은 아이들

여유 있는 선택,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by 이동수

가방 몇 개의 짐을 들고 학교 근처에 얻은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5살 정도 되는 아이를 키우는 부부가 아파트 남는 방 한 칸을 하숙으로 내놓은 거라 생활하기가 여러 모로 불편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줌마와 아이만 있는 집에 총각이 있는 건 참 부담스러웠다. 특히 하나밖에 없는 화장실 이용은 더 그랬다. 그래도 좋았다. 독립생활과 첫 직장 출근으로 설레는 마음은 모든 불편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입학식 후 3일 지나 나는 심한 목감기에 걸려 끙끙 앓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앓는데 순간 서러워 눈물이 났다. 엄마가 생각났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죽을 끓여주고 감기도 나았지만 헛헛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학교 생활 역시 생각만큼 좋지 않았다. 열심히 수업을 해도 아이들은 따라주지 않았다. 담임 반도 활달한 웃음으로 나를 대하는 아이는 몇 뿐이었다. 따라주지 않는 아이들은 학교 생활, 아무도 없는 객지 생활을 더 힘들게 했다. 하루하루 기대가 권태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고생하는데 이런 노력과 고생을 몰라주는 아이들에게 화가 났다. 두 달 정도가 지나자 내 행동의 주된 이유는 의무감이었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야 하니까 하는 그런. 그날도 담임이니까 퇴근하지 않고(사실 퇴근해도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곳에서 할 일이 없기도 했다.) 야간 자습 시간에 교무실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 교실에 가보았다. 그런데 학생주임이 반 아이 하나를 복도에서 따귀를 때리고 있었다. 나는 뛰어가서 학생주임에게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아이가 자습은 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떠들고 있어 나오라고 했는데도 나오지 않아 혼내주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따귀를 때려? 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진정하시라고 제가 알아듣게 잘 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학생주임은 내가 지도할 테니 빠지라고 하며 아이를 끌고 가려고 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학생주임에게 “제가 한다고요. 그만 좀 하세요!”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아이에게 “너 교실로 들어가!” 했다 아이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부리며 “들어가라고! 담임 말 안 들려!” 소리쳤다. 잠깐 나의 도발에 멍하고 있던 학생주임은 나에게 싹수가 없느니, 위계질서가 없느니 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난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안 썼다. 학생주임은 교무실로 가려고 내 멱살을 잡고 끌었다. 난 학생주임의 팔을 뿌리치고 갈 테니 누가 더 잘못했는지 가서 따져보자고 했다. 교무실에 가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한 1년 정도 서로 개 닭 보듯 했다. 물론 흥분이 가라앉고 내가 잘못한 부분이 많음에 죄송하고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사과하고 싶지는 않았다. 객기였는지 모르겠다. 다음 날 선배들이 나를 쳐다보는 눈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학교 생활 꼬였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행복한 학교 생활은 그날부터였다.

내가 뭘 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던 아이들이 내 말에, 내 행동에 관심을 갖고 믿기 시작했다. 담임 반만이 아니었다. 수업을 들어가는 모든 반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나를 존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신경한 나도 느낄 수 있었다. 하도 당황스러워 반장을 살짝 불러 이유를 물어보았다. 반장은 자기들을 무시하고 때리는 선생님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과 싸워가면서까지 자신들을 보호해 주려고 했다고 그런 선생님의 모습에 아이들이 감동받았다고 했다. 그건 당연한 것인데 뭐가 감동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를 좋게 생각하게 되었다니 나쁠 건 없었다. 아니 모든 게 좋았다. 내가 서운하게 해도 실수를 해도 모두 자기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해 주었다. 나를 믿어주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담임을 하는 행운이 교직 생활 첫해에 나에게 온 것이다. 나를 믿어주는 아이들을 속이거나, 대충대충 대하거나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더 노력했고 그러한 노력을 아이들은 더 고마워했다.

아이들과 가까워질수록 아이들이 가진 아픔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이 학교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학교는 후기 학교로 전기 학교에서 떨어진 아이들이 오는 학교였다. 15살 아이에게 고등학교 탈락 경험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또 고등학교 탈락은 집안의 창피였고 감추고 싶은 비밀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교복이그걸 감출 수 없게 했다. 교문만 나서면 아이들은 전기에 떨어진 아이들이라는 어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꿈꾸던 교사 생활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아이들의 아픔을 알지 못했다. 그러고도 아이들이 아무 반응이 없다고, 벽을 보고 수업하는 것 같다고 아이들을 탓하기만 했다. 왜 그런지는 관심 없었다. 이런 내가 한심하기만 했고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아이들은 중학교 때 공부를 못해 그 결과로 떨어진 것이니 그런 대접을 받는 건 네 책임이라는 말을 셀 수 없이 들었을 것이다. 또 앞으로 더 힘들 것이니 그런 대접 안 받으려면 철저히 반성하고 열심히 하라는 지청구도 무수히 들었을 것이다. 태어나서 가혹한 결과가 따르는 선택을 처음 한 아이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모르는 어른들이 만든 제도와 편견으로 15살 밖에 안 된 아이들이 겪은 고통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 자식은 공부를 잘해 그런 대접받으면 안 되므로 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저 꼴 되기 싫으면 알아서 하라고 강요한다. 모두 괴로울 뿐이다. 여유 있게 선택할 기회,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을 하게 사회 전체가 친아이들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경쟁과 가혹한 선택에 내몰린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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