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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SE리제 Oct 12. 2015

애완동물에게 질투를 느껴 보셨나요

04. 성인 여자 vs 7년 차 애완견

우리 집에 새 손님이 왔다. 이 아이의 이름은 '초코'. 아마 비슷한 모습에 비슷한 이름이 많을 걸로 예상한다. 이제 7살에 접어든 이 아이는 초코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은발로 변신 중이다. 어머님께서 장시간 일본에 가 계시게 되면서 우리 집에서 한 달간 맡게 되었다. 초코는 누구보다 영리하고 날씬하며 얌전하다. 하지만 그만큼 조심성이 많아 그런지 장소나 사람을 가리기도 한다. 


오빠에 의하면 '우리 쪼꼬'. 참 예쁘게도 생겼다.


어쨌든 어렸을 때부터 개를 무지하게 사랑하고 좋아하는 우리 오빠와 초코가 만나 이 집에서 오빠의 옆자리 혹은 팔 안쪽은 모두 초코의 차지가 되었다. 눈 뜨나 감으나 초코가 오빠의 첫 번째 고려사항이 되었다. 아직 이 집에 적응하고 있는 중이라 아이가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힘들어한 탓도 있지만, 내가 이 개와 같이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던 걱정은 이미 사라지고 내가 사랑을 뺏기는 건 아닐까 하는 근심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처음에는 이 작고 여린 생물 앞에 적의의 감정을 갖는 나 자신에 대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친숙한 누군가의 도움과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아기와도 같은 초코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아기라면 누구든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하는 최약자가 아닌가. 이 당위성은 내 삐죽거리는 감정을 용케 누르고 앉았다. 차마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하고 쓴웃음으로 내심 삼키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평소와 달리 밥을 거르고 불안해하는 초코를 걱정하는 일에 동참하기로 한다. 하지만 억누른 감정은 언젠가 엉뚱한 방향으로 폭발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질투 어린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이대로도 나는 괜찮은지, 그리고 앞으로 30여 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점검해보기로 한다. 


아마도 그가 초코로 인해 나를 덜 사랑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불안함을 느끼는 걸까. 어쩌면 아이들이 동생이 생겼을 때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더 많이 받는 동생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초코는 마치 아기와 같다. 밥 잘 먹고 일 잘 보면 칭찬을 받는다. 부럽다. 그 애정 어린 목소리와 표정과 손길이 나는 부럽다. 초코를 볼 때 그의 얼굴은 항상 웃고 있다. 게다가 얄밉게도 정말 예쁘고 귀엽기까지 하다. "우리 쪼꼬~♥♥♥"로 시작되는 그들만의 대화가 시작되고 그들만이 쌓아온 7년 간의 역사가 더욱 견고하게 보일 때, 그것이 나는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한 인연이라는 증거 같아 괜히 나와의 관계까지도 저울질하게 된다. 


사실은, 기회만 닿으면 자동차라든가 인형 등 무생물까지도 질시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나에게만 쏟아지던 관심을 다른 존재에게 뺏긴다는 것. 상대적인 사랑의 감소감은 태초의 세계에서부터 이어진 아주 원시적인 감정이다. 이 감정을 잘 처리하지 못해 모든 역사가 바뀌었다. 그 정도로 사랑을 갈구하는 인간의 본능이란 엄청난 것이다. 그것은 그 제3의 존재가 실제적으로 나보다 관심과 사랑을 얼마나 더 필요로 하는가를 불문한다. 그렇다면 나는 아기 취급을 받고 싶은가? 아니오. 아기처럼 사랑받고 싶은가? 예. 그에 필요 한 필수조건으로 아기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가? ... 노코멘트하겠다. 


관계정립을 다시 해보자. 초코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선물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거의 일방적으로 인간의 손길이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부부, 혹은 동반자 혹은 반려자라는 이름으로 그와 함께하고 있다. 초코와 달리 나는 이 사람을 설득할 수도 있고 좀 더 복합적이고 지능적인 활동을 할 수도 있다. 그가 해야할 일을 도울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와 동등한 존재로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이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초코와 같이 굴고자 한다면 이 사람은 얼마나 힘들어지겠는가. 


그는 내게  무신경하다기보다 나 또한 초코의 보호자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믿고있다는 편이 맞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가 나에게 대하는 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식사준비나 청소 등은 서로 적정히 분담하여 돕고있고 결정사항에 대해서는 의견을 물어본다. 비록 초코가 우리 둘 사이에 누워 자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서로 손을 맞잡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좀 더 성숙한 '보호자'로서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다. 분명 초코가 주지 못하는 그 어떤 특별한 것을-물질적이든 화학적이든 감정적이든 간에 그것이 무엇이든- 나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이 사람이 나를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같은 사랑이라 해도 주는 사람의 사랑과 받는 사람의 사랑은, 혹은 지켜보는 사람의 사랑은 확연히 다른 모습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나는 애완동물을 기르지 않아서 강아지나 고양이에 대해서는 모른다. 대신 푹신하고 통통한 베개라든지 귀여운 인형을 매우 좋아했다. 누구의 애완동물 못지않게 이름도 붙여주고 대화도 나눌 만큼 예뻐하고 정을 붙이고 살았기 때문에 오빠가 초코를 대하는 심정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내 감정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렇게나 낯설어 보이다니, 사람 일은 정말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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