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의 마법
평소에 내 모습을 소개하자면 나는 주로 이런 사람이다.
하나. 나는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둘. 나는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다.
셋. 둘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기까지 버퍼링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넷. 게다가 나는 팔랑귀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상황에서 전후 상황과 원인과 논리관계를 바로 따져 묻는 사람이 결코 못된다. 감정이라도 북받쳐 오를 때면 생각과 말문이 먼저 막힌다. 일단 이 상황이 너무 화가 나거나 속상하더라도 무작정 입을 열었다가는 오히려 내게 손해다. 본전도 못 건지고 상대방에 설득당해 자존심과 기분만 더 상하기가 부지기수이므로. 그래서 일단은 입을 다문다.
보통은 그냥 그런 채로 지나가거나 놔두었다. 왠지 모를 불편한 감정이 일어난 채, 상대방에 미심쩍은 동의를 한 채. 그러나 한 번 불편한 감정은 계속해서 내 마음 어딘가를 쿡쿡 찌른다. 며칠이 지난 후에야 그럴듯한 해답이 떠오르지만 이미 시기를 놓친 후이므로 여전히 나는 다른 종류의 불편함을 떠안는다. 정신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소모적이다. 조금 고통스럽고 어렵더라도 정체불명의 감정 덩어리들을 해체해서 최대한 빨리 매듭짓는 게 이모저모로 낫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원하는 대화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이 주제를 꺼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매우 감정적일 때에도 감정을 논리적으로 배열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감정을 눌러야 한다는 사실은 언뜻 역설적이다. 하지만 감정 자체는 논리적이지 않을지라도 감정이 일어나는 데에는 순서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순서를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 이유는 그 과정이 압축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단 5분이라도 잠시 정리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내가 왜 기분이 나쁜지, 어떤 점에서 특히 상처를 입었는지 그리고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지 차근차근 생각해본다. 앞뒤 순서를 이렇게 저렇게 맞추다 보니 생각보다 금세 가닥이 잡힌다. 그렇게 내 감정이 추슬러졌으면 이제 상대방은 반대로 무슨 의도이고 무슨 생각에서 그런 것일지 헤아려본다. 어떤 식으로 화두를 건네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지 머릿속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해본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나는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당신이...라고 말을 했을 때 나는 ㅇㅇㅇ라고 받아들여서 기분이 안 좋았어요. 내가 혼자 오해했을 수도 있으니 당신은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궁금해요.'
이렇게 말을 하면 내가 원하는 대화를 원만한 분위기에서 할 수 있었다. 상대방이 어떤 생각과 전제를 가지고 어떤 의도로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짚어가며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다르게 생각을 했는지도 말할 기회도 부여받았다. 어떤 부분에서 갈등이 심화되었는지 분명해지고 그 부분에서 서로 오해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면 상황은 쉽고 깔끔하게 정리된다. 물론 이런 식의 대화가 언제나 통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나와 신뢰가 있는 사람들, 친구나 가족 등 주변 인물들과는 어중된 앙금이 남지 않게 도와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나는 감정적이면서 생각도 느리고 말도 잘 할 수 없다는 나의 특징이 단점이라고만 생각해왔다. 지금 와서 보니 그런 단점들이 오히려 덤벙대는 성격의 나를 더 신중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단점이 장점으로 승화된다니 자서전에서만 읽는 클리셰인 줄 알았는데, 인간은 역시 재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