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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SE리제 Nov 01. 2015

남자의 적은 남자다

여성의 적이 여성이면 또 어떤가

※주의! 본 글은 영화 <인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영화 <인턴>을 보고 왔다. 전반적으로 괜찮은 영화였다. 다만 의문점이 있다면 첫째, 노트북 도둑 사건을 굳이 넣어야만 했던 이유와 둘째, 바뀐 운전기사가 왜 하필 여자 시니어 인턴이어야 했는가이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중 두 번째에 관한 이야기이다.


문제의 장면은 주인공인 젊은 여 사장(이하 줄스)이 부담스러워했던 남자 시니어 인턴(이하 벤)을 긍정적으로 다시 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씬이었다. 자신보다 지름길도 훤히 알고 시종일관 젠틀한 벤이 점점 마음에 들 무렵, 앞뒤 시야도 보지 못한 채 오히려 사고날 뻔한 책임을 상대 운전자에게 욕을 뒤집어 씌우는, 게다가 길도 잘 모르는 여자 시니어 인턴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이 영화에서 여자 인턴의 역할은 이것으로 끝이다. 나이는 70이지만 유능한 남자 주인공과의 갭을 보여주는 장치로 등장할 뿐이다. 그런데 왜 꼭 운전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억지를 쓰는 다른 시니어 인턴이 '여자'여야만 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는 인턴이 4명 나온다. 시니어 남자 인턴 2명과 여자 1명 그리고 남자 청년 인턴 1명. 벤의 능력만을 대조적으로 부각하고 싶었다면 다른 시니어 남자 인턴을 등장시켰어도 좋았을 것이다. 벤의 자리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제일 크게 작용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굳이 여자에 대한 부정적인 스테레오 타입을 굳히는 그런 에피소드를 활용해야만 했을까.¹ 의도적이진 않았어도 너무 가볍게 생각한 건 아닌가 한다.


기왕 이야기를 꺼낸 김에 좀 더 깊이 들어가보자.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 부정적인 여성 등장인물은 또 있다. 바로 여자 주인공 딸 친구들의 어머니들(아마도 전업주부들)이다. 그들은 일 때문에 바빠 남편이 대신 전업주부 역할을 하고 있는 이 집에 대해 아니꼬운 시선을 보낸다. 심지어 줄스에게는 파티에 들고 올 과자를 주문하면서 혹시 만들 '줄' 모르면 사와도 된다고 비꼰다. 분해 하는 줄스 대신 이들을 점잖게 타이르는 것은 되레 벤의 몫이다. '당신네 같은 여자가 저렇게 잘 나가는 테크 기업을 이끄는 걸 보면 참 자랑스럽겠다'고 대화를 유도한다. 그녀들은 마지못해 수긍한다.


여기서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 있다. '여자의 적은 여자이다.' 여자가 더 여자가 잘 되는 꼴을 못보고 시샘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언뜻 진실된 명제처럼 사람들에게 쓰이고도 있다. 하지만 왜 이 말이 여자에게만 공격적으로 쓰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과연 남자는 그렇지 않단 말인가? 과연 남자는 동성 간의 생존 경쟁이 없단 말인가? 진심으로 그렇단 말인가? 주위에 누군가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사람이, 그래서 더 허풍을 떠는 그런 사람이 남자 중에는 없다고 주장할 셈인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남자의 적이 남자'라는 말이 없고 여자의 적이 여자라는 말만 생긴 걸까. 


되짚어보면, 남자의 적은 오직 남자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자는 여자를 적으로 쳐 주지도 않았었다. 동등한 대결 상대가 아니었으며 대부분에서는 자신을 보조해 주거나 자신이 지켜야만 하는 부속적인 존재였다. 여자의 활동 범위를 내부로 한정시킨 반면 사회라는 바깥 영역에서 생존을 위해 남자끼리 싸우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의 적이 남자라는, 너무나도 당연해서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었던 이 사실은 주로 대부분의 누아르 영화나 전쟁 영화에서는 아주 멋지고 폼나게, 심지어 낭만적으로도 그려진다. 


그들만의 전유물이었던 전투 영역에, 말하자면 고위직군³에도 여성들이 진입하기 시작하면서 남성들은 은연 중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받기 시작했다. 그 불쾌감의 연장선에서 이 여자라는 새로운 종족이 취하는, 남성과는 사뭇 다른 행동들²은 구경과 비아냥의 대상으로 삼기에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다시 묻고 싶다. 남자들도 여태껏 그래 왔는데 여성의 적이 여성이면 또 어떤가. 


다만 바로 짚고 넘어갈 부분은 남성들도 그렇듯이 여성들도 언제나 적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자  친구들끼리는 심지어 달달한 데이트도 가능하다. 또 하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이미 남성 중심적인 시선이 어느 정도는 내면화되어 있어서 여성 간의 대결 양상 자체가 비뚤어져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줄스를 아니꼽게 봤던 그 여성들의 비웃음이 좋은 예다. 이건 하나의 성만을 중요시했던 관습을 아직 벗어나지 못한 과도기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잘못된 선입견과 편견을 극복해서 사람 사이에 진정한 평등 문화가 정착될 때까지 넘어야 할 많은 과제 중 하나가 아닐까.



¹ 한국에서 소위 '김여사'로 통칭되고 있는 여성 운전자에 대한 비하적 시선이 미국에도 존재하는 걸까? 만약 비하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한다면 내가 한국에 있어서 특히 예민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² 여성들의 싸움 방식은 남성과는 사뭇 다르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기 싸움 같은 걸 한다. <여배우들>이라는 영화가 있다. 예전에 단순히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서 보았다가 여배우들 간의 신경전이 너무나도 리얼해서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았던 경험이 있을 정도다.

³ 아주 오랜 옛날부터 여자들도 장터나 논밭에서 혹은 베를 짜고 품을 파는 등 생계 전선에서 일해왔기에 고위직군이라 한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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