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당신을 통해 나를 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다시 진로에 대해 생각해본다. 향후 인생을 나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애로 사항이 하나 있었다면 바로 '장래희망'란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무언가 되어야겠다는, 혹은 무슨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좀처럼 하기 어려웠다. 빈칸으로 내면 혼날 것 같은데 무어라고 적을지 몰라 제일 그럴 듯 해보이는 직업 이름을 써놓곤 했었다.
그러기를 십여 년 지나 대학입시를 앞두고서는 막연히 방송 PD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것도 내가 무엇을 해야겠다는 다짐보다는, 무언가 목표라도 있어야 공부하지 싶어 억지로 정했었다. 어떤 직업을 꼭 정해야 한다면 웃음을 주면서도 참신하고 창의적인 방법을 통해서 울림을 주는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해보고 싶다. 그러나 수단성 목표는 대학 진학에 성공하자 물거품처럼 곧 사라졌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막연히 졸업반이 되면 그때 쯤에는 가닥이 잡히겠지, 정말이지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졸업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미리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은 자에게 그런 보상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이만 먹었을 뿐이지 갓 입학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는 그저 문제를 풀어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미뤄왔을 뿐이었다.
내 적성을 찾는다는 보기 좋은 구실을 붙여 정체성도 애매한 작은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해보았지만 그저 소모될 뿐이었다. 회사를 나온 지 몇 년이 지나있었을 때였다. '열정페이'라는 신조어를 필두로 악덕 고용주에 대한 화제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해졌다. 거의 대부분의 항목에 내가 해당되었다. 고용-피고용 관계는 일개 신의 따위가 아니라 아주 정당한 계약관계로 체결되어야 한다는 교훈만 얻었다.
미리 치르지 않은 대가는 언젠가는 다시 치르게 되어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은 기회비용을 날린 채로. 아직도 나는 막막했다. 게다가 많은 제약이 붙었다. 20대 후반의, 인문학을 전공한, 경제에 밝지 못한, 결혼한, 여자가 대한민국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은 내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라 말했다. 인생 길게 보라고. 그럴수록 나는 사막에서 나침반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우두커니 남겨진 느낌을 받았다. 그럴 때 남편은 내게 말했다. 꿈에서 그만 깨라고. 드넓은 사막 어딘가에 나를 위해 남겨진 보물상자를 찾겠다는 망상은 버리라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말이다. 직업이나 돈을 벌지 않아도 좋으니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을. 그러고 나서 나중에 찾아도 늦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내가 사숙하는 임경선 씨도 그녀의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꿈을 가지긴 가져야 하는데 무슨 꿈을 가져야 할지 모르겠다'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특히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갓 졸업한 이들이 '나의 천직을 찾지 못하겠다'고 괴로워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나이 대에 자신이 뭘 원하는지, 뭘 잘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안다고 확신해도 나중에 바뀔 확률이 훨씬 높다. 사회에 나가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하나둘 차차 알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헤매면서 찾거나, 결국엔 찾지 못했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에서 나름의 보람을 발견해간다. 《태도에 관하여》p.163
이젠 꿈이라는 단어보다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 내가 하면서 불행하진 않다고 느끼는 거, 가끔 충만함이나 순간의 행복을 느끼는 거, 저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여하튼 내 꿈이 뭘까? 나는 꿈을 이루어야 하는데, 라며 꿈이라는 명제에 사로잡히다 보면 오히려 지금 내 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이 시간들, 즉 현실을 제대로 살지 못하거나 현실을 부정하게 되죠. 미래라는 것은 끊임없는 '오늘'의 반복일 뿐이잖아요.《태도에 관하여》p.278
결국엔 어느 지인의 말처럼 '나'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그는 내 안에 모든 답이 있을 거라고, 나와의 대화를 시작해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나에 대해 제대로 안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오죽 했으면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고 설파했을까. 대신 주변에 자신의 소신대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여럿 있어 그들을 통해 나에 대한 힌트를 얻으려고 한다. 그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러한 신념을, 가치를, 길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어려움은 없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매거진으로 발행하려고 한다.
먼저 말하자면 여기에 소개할 사람들은 영웅형 인물은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길을 이제 막 개척하려고 하고, 누군가는 어느 정도 걷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가 꿈꾸고 있는 그 꿈을 손에 쥔 이상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어도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당신과 당신들의 이야기다.
이런 시도는 나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많이 떨리지만, 기대해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