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은 하루가 멀다 하고 뜨거운 이슈들로 가득하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 네트워크에는 정보성 글뿐 아니라 누군가의 경험담이나 이야기들이 빈번히 올라온다. 이목을 끌기 위한 아주 자극적인 글도 있지만, 보는 이의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거나 그저 키득대기 위한 에피소드들도 많다.
나는 보통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편인데 댓글들을 보면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평가를 내리는 모습들이 눈에 많이 띈다. 예를 들어 장난기 다분한 어투로 '남편이 집안 곳곳 숨겨놓은 천 원짜리 비상금들을 찾아 치킨을 시켜 남편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는 사연에 대해 무턱대고 욕을 하거나 글에는 있지도 않은 가정을 끌고 들어와 너무한 거 아니냐며 나무라는 댓글이 달리는 식이다.
구체적인 문장을 제시해 보겠다.
"비상금이 왜 천 원짜리지? 용돈을 그만큼 적게 주었다는 것 아닌가? 너무했다."
이 댓글에서 본인의 의문과 가정은 곧 참이 되어 글쓴이가 '너무했다'는 결론이 난다. 부부 사이에 대해서, 말하자면 남편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혹은 원래 장난을 잘 치는 부부라든지 그런 것에 대해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글이나 이미지에 나타나지 않은 공백을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채워 넣고 그에 따라 자의적인 해석을 내리기 바쁘다.
이 사람이 좋다, 나쁘다에 대한 결론을 빨리 내려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만큼 그 사람의 사정까지 생각해 줄 여유가 없는 걸까. 그도 아니면 다른 이의 약점으로 보이는 것을 재빨리 잡아내어 '나는 그렇지 않다'는 차별감 내지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 걸까. 인터넷 상에서 마녀사냥이 흔해지면서 나만은 피하고자 하는 예민한 심리가 발동하는 것일까.
어차피 우리는 본인이 아닌 이상 그 사람을 완벽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이 점을 비트겐슈타인의 "상자 속의 딱정벌레"의 비유를 가지고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 우리 각자가 무언가 들어있는 작은 상자를 가지고 있고, 자기 상자만 들여다볼 수 있지 다른 사람의 상자는 들여다볼 수 없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의 상자 안에는 딱정벌레가 한 마리 들어있는데 당신의 친구들도 자기 상자 안에 딱정벌레가 들어있다고 말한다고 하자.¹ 그러면 "내 상자 안에 딱정벌레가 들어있다"라는 그 친구들의 발언으로부터 당신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딱정벌레"라는 말을 가지고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당신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심리철학> 김재권 (하종호, 김선희 역) 54~55쪽
그 사람의 상자 안에 있는 딱정벌레가 내가 생각하는 딱정벌레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거니, 그 사람만의 이유가 있겠거니 편하게 봐주어도 좋을 텐데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반드시 '내 식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믿는다.
¹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 상자 안에 어떤 것이 들어 있는데, 그것을 본 내가 '딱정벌레'라 말하고, 내 친구도 자기 상자 안에 있는 것이 '딱정벌레'라고 말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