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합정 카페 거리.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붐빈다. 한적한 곳을 찾아 골목길 어귀로 들어가니 이렇게 예쁘고 조그만, 깨끗하고 환한 장소가 나를 맞이했다. 짐을 내려놓고 주문을 한 뒤, 책을 잠깐 읽고 마음의 짐을 풀기 위해 브런치를 켠다.
요새 글을 잘 쓰지를 못했다. 내가 뭔가 하지 못한다는 상태는 어떤 신호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읽다 어느 샌가 손에서 놓고 있었던 《슬럼프 심리학》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사두고 차마 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여러 책들도 꺼내 번갈아가며 읽었다.
내가 살면서 제일 열심히 책을 읽었을 때는 유치원 시절이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그때에는 여러 종류의 동화책들을 섭렵했다. 30권짜리 삼국유사라든지 이런 걸 포함해서 다양한 종류와 느낌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 100, 200권짜리 그림책 전집 등 그 시절 내 수준에 맞추어 다소 크고 얇고 글씨가 몇 없긴 했지만, 몇 권을 펼치면 어떤 그림과 내용이 있다는 걸 줄줄이 꿰고 있을 정도로 나는 책을 좋아했다. 오죽했으면 친구들도 책벌레라고 나를 놀렸을까.
그런데 초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불량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꼴에 '이제 후배도 생기는 2학년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던 걸까. 그 이후로 대학 시절까지 내가 그나마 펼쳐놓고 읽은 책은 교과서나 참고도서 외에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학교에서 배우는 문학이라는 것은 내가 음미하기도 전에 해체되고 해부되었다. 종국에는 누가 정했을지 모를 '저자의 의도'라든지 '단어의 함의' 따위만이 남았고 나는 그 파편들을 억지로 뇌에 때려박아야만 했다. 문학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라면서도 결국 우리가 배우는 건 해석의 옳고 그름이었다. 참 재미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정해놓은 해석만을 배운다는 건.
더 나아가 나는 문학을 증오하기도 했었다. 1학년 때 연달아 들었던 문학 과목에서 쓴 잔을 마신 탓이 컸다. 첫 학기에 들었던 교양과목 중에 '대중예술과 문학'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처음부터 교수님은 '대중예술'은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 이고 문학만을 다루는 수업이라고 소개하셨지만, 첫 시간의 여유로움과 교수님의 유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 패착이었다. 교수님이 의욕에 불타 석사과정에서나 할법한 아도르노의 영어 논문을 가져와 강의하셨던 것이다. 철학 중에서도 난해하기로 유명한 그 미학의 개념이 어찌나 모호하고 역설적이던지 이해의 언저리에 가기도 전에 머리가 빠개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해야만 했다.
뒤이어 2학기에는 '고전문학과 소수자'라는 과목을 선택했다. 지극히 단순한 사회 인식을 하고 있던 나에게, 그러니까 소수자와 약자가 가지는 사회적 함의 자체를 이해하지도 못했던 미개한 시절에 그 강의는 참 고역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공식 외에 문학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도 견해도 없던 내가 다른 해석까지 배우다니 정말이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두 과목 모두 낙제점을 받았고, '문학'이라 하면 머리부터 아파왔다. 문학은 참으로 상종 못할 것이었다.
물론 대학 시절 어느 땐가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기왕 읽을 거 제대로 읽자는 큰 야망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택했던 것이 실패 요인이었다. 낯설고 재미도 없는 고대 서사시라는 큰 벽 앞에서 방황하다 결국 1/10도 다 못 읽고 반납하고 말았다.
최근에 들어서야 문학은 지루하고 따분한 것이라는 편견이 조금씩 깨지고 있다. 특히 소설은 단순히 허구이며 어떤 감정만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만이 아니었음을 드디어 알아가고 있다. 사진도 단순히 예쁘기만 한 샷은 얼마나 허무한가. 어떤 작품이든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 어떤 문제 의식이 기저에 깔린 것임을 간과했다. 너무 기본적인 전제였기에, 소설이 그 배후에 생각보다 훨씬 큰 담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얼마나 무지하고 또 오만했던가.
변화의 원인을 찾자면 일부는 해석의 옳고 그름에 대한 압박에서 자유로워진 덕분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평가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해 책을 읽는다. 또 일부는 그래도 20대를 보내며 조금씩 쌓아 온 어떤 인식의 체계와 만나 호응 작용을 하기 때문이리라. 책은 나를 보게 하는 거울이다. 책을 읽으며 그 사람의 문장이 질문을 던지면 나는 자연히 답을 하기 위해 내 생각을 정리해보곤 한다. 흩어져 있는 파편들을 그러모아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모호했던 가치나 개념들의 경계를 확인하기도 한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삶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나 새로운 해석을 발견할 땐 짜릿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든가 《1984》가 내겐 특히 그런 책이다.
그래서 요즘엔 마음이 번잡해지거나 우울해졌을 때, 나에게 새로운 자극이 필요할 땐 먼저 책을 손에 쥔다. 그리고 나를 다시 들여다 본다. 이제는 책 읽는 정석 따위에 매달리지 않는다. 이것저것 내키는 대로 집고, 내키는 만큼 읽고 또 내키지 않으면 내려놓는다. 나 같이 자신을 알고 싶거나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책은 좋은 대화 상대이다. 보통 책을 권면하는 어른들은 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책을 읽으면 내가 하지 못했던 일까지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아는 게 많아진다'고. 하지만 난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 자신에게 대화를 걸고 싶을 때, 하지만 무슨 질문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책을 펴면 책이 대신 물어봐 줄 거라고. 책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후기나 못다 한 이야기는 @writerL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