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슬럼프.
아직도 내 삶에선 불안에 젖어 사는 순간들을 만난다. 마치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 뚝, 뚝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시간들이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러한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 내 속사정을 자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의미 없이 텔레비전 앞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핸드폰 액정만을 들여다보는 시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지점에서 언뜻, 어렴풋이 깨닫는다. 아, 뭔가 불안에 떨고 있구나.
보통 그 불안이라는 녀석은 나를 향해 있기 마련이다. 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므로 내가 맞이할 미래도 당연히 불안하다. 하필 그럴 때엔 내 정신은 진공상태를 맞이한다. 잘 헤쳐나갈 수 있다는, 혹은 잘하든 못하든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조차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렇게 정작 마주해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미적거리며 시간만 때우고 있다면, 그건 다시 내 어느 지점이 삐걱거리고 있다는 신호다.
잠시일 뿐이라도 누군가 텅 비어버린 공간에서 나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잡아쥐었다. 실상 내가 해야 할 일은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밥 짓기, 설거지하기, 바닥 닦기, 공부하기. 하지만 이 압박은 너무나도 추상적인 불안에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일의 크고 작음 같은 속성과는 상관이 없는 듯하다. '의무'라는 개념이 성립하는 그 순간 갈등이 시작된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나는 못 할 것 같은데. 내 능력이 닿지 않을 것 같은데. 나에게는 버거울 것 같은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떤 일이든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쉽게 쉽게 생각하라는 주위의 조언이 많았지만 그냥 난 그게 불가능했다. 쉽게, 가 어려운 걸. 쉽게라는 길은 애초에 내게 뚫려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정석'에 대한 강박증이 막아놓은 길. 무슨 일이든 따라야만 하는 정석이 있는 것 같고. 그 정석에 맞지 않으면 틀린 게 아닐까 하고. 또 틀리면 엄청난 일이 생길 것만 같고.
그냥 하면 될 텐데, 사람의 마음이 생각처럼 따라주느냔 말이다. 다른 이들은 그냥 하는 걸 내가 하기 위해선 길을 조금 벗어나도 될 거라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냥, 막, 생각하지 말고 저질러버릴 용기.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든 되겠지가 아니라, (나니까)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는 관점의 전환.
오른손잡이인 나는, 고기를 워낙 좋아해서 편하고 쉽게 고기를 자르고 싶은 마음에 왼손 가위질을 연습한 적이 있었다. 참 당연하게 느껴졌던 가위질이었건만 왼손으로 하려니 헛손질만 해댔다. 어느 부분에 힘을 주고 어느 관절과 근육을 움직여야 하는지 오른손으로 번갈아 쥐어가면서 비교한 끝에 왼손으로도 가위질할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겐 참 당연한 일들이라도 누군가에겐 열심히 연구하고 연습하고 훈련해야만 겨우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왼손의 가위질 같은, 그런 일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