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 밖이 모두 낭떠러지로 느껴졌다
어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문득 중학교 때 일이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에는 항상 우리 집에 와서 나를 기다렸다가 같이 등교하는 옆집 친구가 있었다. 등굣길에 혹은 하굣길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종종 그 친구가 나에게 이것저것 아는 척을 하곤 했었다. 듣다가 사실이 아닌 부분이 있으면 정정하거나 반박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 친구는 나에게 섭섭함을 표하곤 했다. 어느 날은 이렇게 외쳤다. "이런 것까지 꼭 다 이겨먹어야겠냐!" 틀린 걸 틀리다고 말해주었을 뿐인데, 왜 애초에 틀린 걸 말해놓고 나에게 짜증을 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보다 좀 더 공부를 잘하는 편인 내게 자신도 잘난 점이 있다는 걸 어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다. 그냥 내가 모르는 척 넘어갔다면 참 평화로웠을 텐데. 그러나 그땐, 그러니까 내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땐 내 사고방식은 이진법이었다. 옳다, 틀리다. 안다, 모른다.
초등학교 때, 담배는 건강에도 나쁘니 피지 말라는 흡연예방교육을 받고서는 선생님께 그런데 선생님은 왜 담배를 피우시냐며 물었다가 된통 혼난 적이 있다(대략 '너희 때문에 나까지 담배를 못 펴야겠냐!' 이런 논지였다).
몰라서 질문하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 질문하기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그대로 받아들여 간혹 말도 안 되는 질문들로 사람들을 당혹시킨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첫 영어 수업 시간에 '보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가 선생님께서 (설마 이런 기초도 몰랐으리라고 기대도 하지 않으셨으므로) 진땀을 뻘뻘 흘리셨던 적이 있다. 이상한 생물 쳐다보듯 보던 급우들의 반응도 기억난다. 다행히 곧 수업시간이 끝났지만. 이것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구나 느꼈던 건 대학에 들어와서였다. 어느 남자 후배 녀석 하나가, 누나 이런 것까지 물어보면 선배로서의 권위가 떨어져 보여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나에게 소수의 '아는' 영역 외에는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진법을 흑/백이라고 친다면 회색지대라는 게 거의 전무했다. (브런치에서 몇 번씩이나 거론하고 있는) 나의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요구하듯이 '대충' 써내는 일이 힘든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대충 안다는 건 불가능했다. 알거나, 아예 모르거나 였다. 다운로드 버퍼링이 99%라도 다운받지 못한 1% 때문에 모든 파일이 깨져 쓸 수 없듯이.
그렇게나 고지식하고 딱딱했던 나는 대학이라는 작은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서 외적으로는 그나마 8진법이나 16진법 정도로는 유연해졌지만, 아직도 내적으로는 비슷하다고 느낀다. 0과 1을 가르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 조그만 오류라도 1을 0으로 순식간에 바꿔놓을 수 있다는 걸 알기에, 티끌 같은 흠집 하나도 벌벌 떨며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때 주저하는 이유도, 새로운 상황에 던져졌을 때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고 긴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서 연유하는 게 아닐까. 나를 잘 아는 지인이 나는 어떤 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 심하게 예민하고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이것과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브런치에도 이걸 이렇게 써야지, 이 이야기를 써볼까 매일 생각하지만 조그만 흠결이라도 같이 떠오르면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러니까 최근에 올라가는 몇몇 글들은 그런 흠결이 미처 떠오르지 않았거나 그런 계산조차 덮어버릴 만큼 어떤 강력한 영감에 의한 글이라고 보면 된다.
요즈음 집에 사막같이 광활한 시간 속에서 앉아있다 보면 가시투성이인 선인장을 발견하고는 한다. 그 앞에 털썩 앉아 가만히 앉아 조용히 들여다보다 문득 소중한 물 한 줌을 얻어먹곤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전히 바싹바싹한 모래인지 먼지인지 위를 걷지만 전보다는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을 안고 다시 여정을 출발하는 것이다. 어느 소설*의, 기억을 잃어 옛집에서 자신의 어렸을 적 물건이나 추억을 끄집어내 지나간 삶을 재구성하는 주인공이라도 된 듯이.
*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움베르토 에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