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SE리제 Oct 05. 2017

아버지와 빳빳한 지폐

옅은 분홍빛과 살구색 그 중간 어디쯤.


딸의 취업과 첫 출근을 축하하며 아버지가 준비해두신 오천 원 신권 스무 장의 자태는 참 고왔다. 그 빛깔이 옅으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선연한지. 마음까지 선득선득하도록.


주시니 받아 들긴 하였으나 그냥 이대로 받아가기에는 염치가 없었다. 해드린 것도 없는데 처음부터 또 받기만 한다. 고심하다 집에서 나서는 길에 곧 여행 가시는 어머니께 슬쩍 넣어드렸다. 개구진 웃음으로 비밀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집에 가는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잔상이 남는 것이다. 아마도 은행에서 함빡 웃으면서, 딸이 취업을 했다는, 은행원으로서는 굳이 궁금하지 않았을 정보까지 추임새처럼 넣으시면서 발급받으셨을 그 빳빳한 신권 오천 원 스무 장이. 나서는 길에 가슴팍에 자리잡아 마음까지 뿌듯하게 하였을 그 분홍빛 어른거리는 스무 장이. 천 원권도, 만 원권도 오만 원권도 아닌 오천 원권. 잔돈을 많이 남기지 않으면서도 쓰기 편하도록 고심하신 결론일 오천 원권. 손이라도 베일 듯 빳빳한 신권엔 어느 장소에서든 당당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풀 먹이신 듯하였다. 


그것은 받고 제 돈으로 액수를 채워 드릴걸, 그런 생각도 뒤늦게 해보았다. 혹시라도 당신의 그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실까 저어되는 탓으로. 받은 자리에서 어머니께 넘겨드렸으니 실망하셨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늦게 밀려왔다. 그러나 역시 어차피 쉽게 써서도, 쓸 수도 없는 돈이었다. 보관해놓고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도 방법이었겠지만 이미 돌아선 길이니 어쩔 수 없다.


대신 여기 아버지가 주신 선연한 사랑을 기록한다. 숫자보다 위대한 마음의 빛깔을 새긴다. 마음이 궁핍해질 때마다 한 장씩 꺼내어 볼 수 있도록.

매거진의 이전글 글을 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