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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Mar 14. 2020

#_영화 <기생충>의 문제제기 방식과 저널리즘

전염병보다 더 창궐하고 있는 가짜뉴스에 대처하는 자세

아직 한 달도 안 되었다. 벌써 가물거리려고 하지만, 2월 9일 한국 영화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나라 말로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찍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오스카 4관왕에 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오스카상의 그 작품의 100여개가 넘는 상 중 하나지만, 자본주의의 정점에 있는 미국의 가장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아카데미상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기생충 영화 이야기나 봉준호 감독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넘쳐나기에 생략한다. 지금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기생충 영화의 3가족의 관계를 통해서 들여다보는 우리의 현실과 봉준호 감독의 문제제기 방식이다.


부자는 나쁜가? 가난은 나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는 선이고, 가난은 악이다. 돈은 신이고, 빚은 악마다.

어떤 이는 신들 위에 군림하며 천상의 삶을 누리고 있고, 어떤 이는 악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평생을 허덕인다.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리 다르진 않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을 혐오하면서도 동경한다. 욕하면서도 부러워한다. 아니 부럽기 때문에 욕하는지도.

그런데 막상 직접적인 금전관계에 놓이게 되면 상황은 급변한다. 혐오도 부러움도 아닌 현실만 남는다.


기생충에서 보여준 세 가정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악당도 발견할 수 없다. 서로 죽고 죽이는 끔직한 일이 벌어지지만, 이해가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라는 점. 그걸 영화로 표현해 냈다는 점이 놀랍다. 아마 그 영화의 작품성은 그런 지점에서 더 빛난 게 아닐까 싶다.

기택(송강호) 가족이 저지른 행동은 명백한 범죄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범죄를 불편해 하기보다 어느 지점까지 그들의 편에서 영화를 보게 만든다. 그러다가 문광 가족의 실체를 마주한다. 문광(이정은) 가족들 대하는 기택 가족의 행동에서 불편함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싸움이 시작되고, 그 싸움이 극에 달했을 때 연교(조여정)의 전화가 걸려온다. 잠시 후에 도착하니 짜파구리를 끓여달라는 전화다. 그렇게 마치 세 가족의 하나의 접시에 담겨 있음을 암시(두가지 라면+한우)하는 듯한 짜파구리가 만들어지고, 영화의 긴장감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사실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니다. 진실은 사실 뒤에 숨어있다. 관점에 따라 악당은 뒤바뀔 수 있고, 불편함을 느끼는 강도도 달라질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결국 '내 상황'이라는 결정적 환경에 의해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하여 진실은 내 기준으로 왜곡된다. 이런 본질적인 왜곡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고, 우리는 대화와 소통을 통해 다른 사람의 입장과 다른 사람의 생각들을 접하면서 스스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던 진실을 바로 잡아간다. 문제는 그 왜곡이 누군가의 의도와 목적에 의해 작위적으로 이루어질 때에 있다.


정치권에서는 요즘 선거를 앞두고 다양한 공방이 치열하다. 가짜뉴스는 전염병보다 더 창궐해 있다. 문제는 모든 것을 너무 단순히 기정사실화해서 판단해 버리는 일부 언론이다. 가짜 뉴스에 팩트도 확인해 보지 않고, ‘그럼 그렇지’라고 판단해 버리는 일부 군중의 어리석음이다. 지금 우리에겐 누군가를 욕할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그 자유에는 책임이 필요하다. 책임지고 말하는 비판이라야 비로소 욕할 “자격”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금 가장 잘하고 있는 건 여당도 야당도 아닌 바로 우리 국민이다. 불과 2주전에 그렇게 말이 많았지만, 누군가 묵묵히 보여주고 있는 희생과 노력, 사랑으로 힘든 시기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 정작 욕할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말이 없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 최선의 결과를 전 세계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다.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고 해서 자만해선 안 될 것이다. 진짜 문제는 전염병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해 파생되는 두려움과 그 두려움으로 야기되는 심리적 위축, 그런 위축에 따른 경제적 후퇴에 있다. 당분간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코로나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세계 경제가 여러모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이런 것이 팩트다. 현재의 정부가 무능해서도 아니고, 야당이 발목을 잡아서도 아니다. 물론 언론의 보도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쏟아지겠지만 말이다.


필자가 언론 보도를 해석하거나 받아들이는 기준은 팩트여부보다 진실의 한 조각인 팩트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본다. 그 방향이 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곳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오히려 분열을 조장하여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엉뚱한 곳을 보게 만드는지를 관찰한다. TV에 나왔다고, 뉴스에 나왔다고 결코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유튜브 동영상은 말할 것도 없다.


(옥스포드대학교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 조사자료 참조)


우리나라의 언론의 신뢰도는 주요 38개국 중 4년째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 책을 읽을 때도 어떤 작가의 어떤 글이냐에 따라 그 책을 신뢰하는 범위가 달라지듯이 뉴스기사나 칼럼, 관련 동영상을 볼 때도 그러한 맥락에서 보지 않으면 엉뚱한 정보를 사실로 믿게 되고, 그런 믿음이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가 감수해야할 몫이긴 하다. 다만 나는 무언가를 비판할 자격과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정치적 필요에 의한 프레임들을 걷어내고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는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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