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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Mar 23. 2020

#_말통장

내가 하는 말이 들고 나는 보이지 않는 통장이 있다.

나는 말이 많은 편이다. 말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내가 아는 게 많으니 타인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책을 많이 읽고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의 깊이가 조금 더 깊어질수록 말을 조금씩 아끼게 된다.


친한 동생을 만났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최근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이어지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는다. 예전에는 내가 무언가 중요한 걸 알려줘야 좋은 대화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잘 들어주기만 해도 좋은 대화가 된다.


이야기의 핵심은 자기랑 친한 어떤 사람이 자꾸 사람에 따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르게 하고 다닌다는 거다. 듣고 보니 상당히 불쾌할 것 같았다. 알고 보니 나도 아는 후배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살짝 그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났다. 흩어졌던 이야기와 기억의 파편들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그 이야기의 뚜렷한 결론은 없었지만, 내 마음속으로는 ‘역시 늘 말을 조심해야 해’라는 단순한 교훈이 남았다.


누군가가 듣지 않는다고 해서 그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하면 그게 비밀이라고 해도 결국 알게 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 대한 칭찬이나 좋은 이야기도 돌아 돌아 결국 들어간다. 그 사실만 알면 단순해지는데 자꾸 까먹는다.

말하는 순간에는 마치 밀폐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착각이 든다.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린다. 나도 의도치 않게 타인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말하거나 누군가가 타인에 대해 험담하는 말에 쉽게 동의하는 경우가 있다. 지나고 보면 다 경솔한 행동임을 깨닫는다.


누구에게나 말통장이 있다.

내 경험, 내 독서, 내 생각은 정기적으로 말통장에 입금되고 내가 말하면 출금된다. 좋은 말은 투자성 출금이다. 다시 나에게 더 좋은 말이나 글로 입금된다. 나쁜 말은 소비성 출금이다. 다시 입금되지도 않을뿐더러 더 많은 말과 글을 소비하게 만든다. 거짓말은 거의 사채 수준이다. 이자의 이자가 붙어 나중에는 감당하기가 어렵다.


말이 많아질수록 지나친 삶이 되고, 말보다 삶이 넘치면 지극한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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