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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Apr 08. 2020

#_연필을 깎다

우리는 책에서 그저 향기를 맡을 뿐이다.

연필깎이 말고, 칼로 직접 연필 깎는 걸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냥 연필은 자주 쓰진 않고, 책 읽을 때 다양한 색연필을 많이 쓰는 편이라 색연필을 자주 깎게 된다.

왼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듯 색연필을 쥐고, 오른손 엄지로 칼등을 지그시 눌러 결을 하나씩 내며 깎기 시작한다. 나무부분은 결의 느낌을 균등하게 살리는 것이 포인트다. 너무 힘을 주면 깊이 파여서 연필심 부분을 건드려 모양이 망가지고, 너무 힘을 빼면 칼이 겉돌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얻은 “적당한” 강도와 결을 잡는 게 핵심이다.


장자 천도편에 수레바퀴를 깎는 장인 윤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나라 환공이 책을 읽고 있는데 윤편이 환공에게 묻는다.

“대왕께서 읽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환공이 말한다.

“이것은 성인들의 말씀이니라.”

“그 성인들은 지금 살아 계신지요?”

“돌아가셨느니라.”

“그렇다면 왕께서 읽고 있는 것은 옛 성인의 찌꺼기입니다.”


윤편이 이렇게 말하자 왕은 크게 화를 내며 합당한 설명을 하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거라고 말한다.

이에 윤편이 말한다.

“제가 평생 수레바퀴를 깎는 일을 하여 그에 비유하여 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수레바퀴와 굴대를 잇는 구멍을 너무 덜 깎으면 빡빡해서 들어가지가 않고, 또 너무 많이 깎으면 굴대가 헐거워 쓸 수가 없습니다. 그 알맞은 크기는 오직 제 손의 감각으로 터득해 마음으로 느끼는 것으로 입으로 말할 수 없으니 바로 그 사이에 비결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제 자식에게도 일깨워줄 수 없어 나이가 일흔이 되어도 여전히 수레바퀴를 깎고 있지요. 옛 성인의 말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가 깨달은 심오한 이치를 글로 다 표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여 성인들이 느낀 이치의 향기정도만 나는 찌꺼기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 말은 들은 환공은 윤편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다.


연필을 깎는 것도 아무리 말로 설명해 주어도 본인이 직접 칼로 연필을 깎으며 미묘한 감각을 느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실제로 <연필 깎기의 정석>이라는 책이 있다.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을 정도로 연필깎기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 책을 읽는 이유는 연필을 잘 깎고 싶어서가 아니라, 고작 연필하나 깎는데도 이런 집요함과 노력을 기울이는데,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통찰을 얻기 때문이다.

어쩌면 매번 연필을 깎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이 연필이 오늘 하루라면 나는 하루를 알맞게 보내고 있는가? 이 연필이 지금 내가 하는 일이라면 나는 그 일에 정성을 다하고 있는가?


우리는 책에서 그저 향기를 맡을 뿐이다. 정답은 이미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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