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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Apr 13. 2020

#_사소하지만 끈질긴 집요함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마법

출근하는 길이었다. 

날씨는 선선했고, 공기는 차가웠지만 춥지 않았다.

 어제 읽으려고 들고 왔던 책 2권 중에 하나는 외투 주머니에 꽂아 넣고, 하나를 펼쳐 읽으며 천천히 익숙한 길을 감각에 맡기며 걸었다. 글은 재미있었고,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도 모른채 잠시 빠져서 읽다가 문득문득 차도를 건너야 하거나 장애물이 생겨 고개를 들 때면 ‘아, 지금 여기까지 왔구나’ 생각했다. 

한참을 그렇게 몰두해 있는 와중에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모래라고 하기엔 좀 크고 작은 돌멩이라고 하긴 무척 작은, 촉감적인 느낌으로는 좁쌀만 이물질이 왼발 앞꿈치쪽에서 느껴졌다. 책에 몰두해 있는터라 당장 빼기도 귀찮고 그렇게 신경쓰이는 건 아니라서 한번은 무시하고 걸었다. 걷다보니 잠시 또 이물감이 사라졌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다시 아까와는 조금 다른 쪽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물론 처음과 같은 녀석임에 틀림없었다. 책에 집중해있는 모드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 1분여간 저항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 작은 녀석이 나를 항복시켰고, 나는 잠시 멈춰 신발을 벗고 바닥에 가볍게 탁탁 쳐서 깨끗이 털어낸 후 다시 신발을 신고 걸었다. 그 순간만큼은 기분 좋은 상쾌함을 느꼈다. 이물감을 느낀 감각의 시간 '한줌'만큼의 개운함이랄까.


그렇게 다시 책에 집중하며 여유있게 사무실에 도착했다.

몇개의 책장을 지나 내 책상으로 왔다. 자리에 앉아 유독 까맣게 보이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모니터 왼쪽 아래 모서리에 평소에는 없던 하늘색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있게 아닌가.

메모를 떼어내어 살펴보니, 굉장히 독특한 메모였다.


‘줄넘기 줄넘기 줄넘기 줄넘기 ……’

무려 ‘줄넘기’가 17번이나 적혀있었다. 


사정은 이랬다.

어제 아이들과 같이 사무실로 오면서(코로나로 인해 주 3일은 같이 출근중이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줄넘기를 챙겨오지 않았다. 아침에 아이들에게 읽을 책, 공부할 문제집, 놀 거 등등을 챙기라고 말했는데, 늦잠자고 일어나 서둘러 나오다보니 줄넘기를 안챙긴거다. 요즘 한창 줄넘기에 빠져서 운동장에 가면 줄넘기와 혼연일체가 되곤 하는 녀석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단뛰기를 2-3번 정도 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이젠 연속으로 17번까지 하질 않나, 못해도 15개정도는 무리없이 해내고 있었다. 어쨌거나 어젠 안 챙겼으니 저녁 먹고 운동장으로 같이 운동하러 갈 때 너무나 아쉬워했다. 그리고 밤에 집으로 갈 때 나한테 몇번이고 금요일엔 꼭 줄넘기 챙기라고 말하달라며 신신당부했다. 내가 한참 뭘 쓰고 있던 터라 듣는 둥 마는 둥 했나보다. 결국 포스트잇 하나를 가져간다고 하더니 사무실을 나가기 전에 내가 잊지 않도록 17번이나 줄넘기라고 적은 메모지를 모니터에 붙여놓은거다. 그러고 둘러보니 책상 한편에는 아들 녀석이 노란색 포스트잇에 ‘축구공, 축구화 챙겨오기’라고 적혀있다. 귀여우면서도 집요한 아이들의 행동이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것이라도 그것이 집요하게 반복되면 우리는 그 사소한 것에 집중하게 된다. 오늘 아침 내 신발 속에서 숨어있던 작은 모래알갱이나 아이들이 내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해 적어놓은 메모처럼 말이다.

요즘 부쩍 “집요함”이라는 단어가 크게 다가온다. 오늘 그 단어를 풀어쓸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런 “사소하지만 끈질긴 집요함”이 우리를 행동하게 한다. 

결국 인생도 '그 사소해 보이는 하루의 반복'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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