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고 경험한 만큼 자유로워지셨나요?
5일간에 걸친 조금 긴 리뷰입니다.
책 내용과 더불어 연상되는 제 개인적인 생각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공부의철학 -1
첫 번째 질문은 나에게 필요한 성장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유독 이 책이 끌림이 있어서 시작해 봅니다.
이 책은 공부는 사람들의 집단적 공조화인 공감에서 자신을 분리하는 작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관계에서 공감만큼 중요한 건 없는데, 공감에서 자신을 분리하라니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만, 가장 나다운 면을 찾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공부는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상실하는 과정이라는 말도 와 닿네요. 이 철학자 참 묘합니다. 니체에게 상당히 영향을 받은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나는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무언가를 파괴했는지, 상실했는지 돌아봅니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는 책에서 언급해주셨던 질문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공부하고 경험하는 만큼 얼마나 더 자유로워지셨습니까?
도대체 자유라는 게 무엇일까요?
왜 자유가 중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오직 자유함을 통해서만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다시 그 자유로움을 뒤집습니다. 무한한 자유, 무한한 가능성은 오히려 너무 막연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철학은 유한성을 대하는 자세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쉽게 풀어서 해석해주기 위해 먼저 지금의 나를 만든 환경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게 마련입니다. 타자의 욕망을 내재화하는 것이지요. 애당초 나만의 욕망이라는 게 있디는 한 것일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혼자서 오롯이 존재하는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개성적이지만, 개성이라는 것 자체가 '타자 의존적'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언어. 나에게 어떤 언어가 설치(install)되어 있다는 것, 다르게 말하면 특정한 언어에 적응했다는 것 자체가 타자에게 점령당했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언어 습득은 환경의 코드를 세뇌당하는 일이고, 언어를 통해 특정 환경에 동조를 강요당한다는 것이지요.
군대에 가면 군대 말투를 쓰게 되고, 직장에 들어가면 그 직장에 맞는 언어를 구사하게 되는 것이 그 예가 아닐까 싶네요. 하지만 근본적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면 언어 문화권 전체가 가진 어떤 속성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환경과 언어를 통해 인간이 이미 타자의존적임을 밝혀두는 이유는 아마도 우선 지금 내가 존재하는 형태를 재인식하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타인과 동떨어진 그저 나만의 존재라는 건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려는 것이지요. 그것을 알아야 비로소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모든 것에서 해방된 상태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그것과 함께 하면서도 자유로운 상태인 것이지요.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의 아이러니가 존재합니다. 더 많은 철학적 사유를 하고,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경험을 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한없이 작은 것인가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공부한 것 같은 느낌이지요. 그게 바로 자신의 유한성을 체험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유한하기 때문에 빛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존재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의 관념에 불과합니다. 결국 나에 대한 인식은 나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공부를 하면서 그걸 깨닫게 되죠. 그리고 그 유한성을 기준으로 새로운 자유가 규정되는 것입니다. 유한성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지 않으면 자유를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데 평소에 늘 가던 길, 늘 먹던 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자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어떤 오류로 인해 내가 범죄자로 지목되어 1년간 감옥에 갇히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해봅니다. 처음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겠지만,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적응할 것입니다. 그리고 1년만에 누명을 벗고 나와서 평소에 늘 가던 길, 늘 먹던 밥을 다시 먹게 될 때 '자유'란 무엇인지 강렬하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공부는 자유를 위해 하는 것이고, 오늘은 그 자유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되는 밤입니다.
#공부의 철학 -2
"인간은 언어적 가상현실VR을 살아간다."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리게 하는 이문장이 오늘 저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언어가 없으면 사물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름을 붙이고 나서야 우리는 그것을 기억할 수 있게 됩니다.
어쩌면 애당초 이름이라는 것 처음 짓기 시작한 이유가 기억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어의 타자성에 이어 우리는 언어로 지은 세상 속에 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이 좀 많아집니다.
흔히 말하는 프레임이 바로 우리가 만든 언어의 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떤 프레임 안에 갇히면 A라는 사실에 우리는 B라는 결론을 너무 성급하게 내리게 됩니다. 몇 가지가 바뀌지 않은 진실이라고 생각을 고정시켜버리면 이후 다른 진실을 만나도 이미 믿음 진실을 강화하는 방향의 해석만 하는 것이지요.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런 동조화에 서툴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최진석 교수님의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라는 책에서 철학은"明"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해와 달이 공존하는 상태, 즉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 두가지 양극단을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 마음자세가 철학이라는 것이지요.
사람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을 특정한 단어로 규정해 버리면, 이제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그 규정 내에서 해석되게 되죠. 이게 참 위험한 일이거든요. 내가 얼마나 그 사람을 봤다고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10년, 20년을 함께 산 부부도 서로를 온전히 알기 어려운 데 말이죠.
이 책의 도입부에서 말한 공부는 자기 파괴라는 말은 이런 이유로 필요한 게 아닐까요? 지금 나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타자(나 이외의 모든 것)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훈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장은 그 제목처럼 "공부와 언어"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과 관점을 제시합니다.
공부의 목적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오늘 본문(p.41)에 나와 있는 말처럼 "어떤 환경에 속해 있되 거리는 두는 방법"을 알아야 가능해집니다.
이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바로 언어입니다. 앞서 언급한 언어의 타자성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나는 타인의 말과 생각에 의해 길들여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뭘까요? 내가 사용하고 있는 기존 방식대로의 언어가 아닌, 날 것 상태의 언어를 인식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개념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림까지 친절하게 그려주셨어요.
(그런데 그림이 경우에 따라 더 복잡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 같아요)
책에서는 세탁기의 예를 드는데요. 예컨대 세탁기가 고장 나서 버려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는 거죠. 분명 어제까진 세탁을 수행하는 도구로써의 무언가 였는데, 그 도구의 기능이 상실되고 나면 더 이상 세탁기가 아니라 그냥 고철 덩어리가 되잖아요. 그때 그 전과는 달리 '그냥 물건'으로 인식되는 느낌이 들잖아요. 그때 그 물건의 물질성이 부각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언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노자 도덕경의 첫 문장 혹시 기억하시나요?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이 구절을 조금 쉽게 해석하면 이런 말일 것입니다.
“도를 도라고 불러도 되지만, 항상 도라고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이름을 (그) 이름으로 불러도 되지만, 항상 (그) 이름일 필요는 없는 것처럼.”
어제 이름에 대해서 언급했지만, 이름이든, 언어든 애당초 누군가 그렇게 정해놓은 하나의 약속이죠. 이 책의 표현대로라면 하나의 '동조'자 '타자성'이죠. 그렇기 때문에 도덕경 첫 문장에서 노자 선생이 언급한 것처럼 항상 그것을 그렇게 단정 지어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언어에 대해 이토록 깊이 있게 설명하는 이유는 언어를 통해 구축된 '타자성'을 인식하고, 자신을 언어적으로 해체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쓰는 "도구적 언어"와 언어 그자체로 조합하는 "완구적 언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 쉬운 이해를 위해 개인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희 딸이 어릴 때부터 독특한 언어체계를 스스로 만드는 걸 자주 봐왔는데요. 그 중 한 가지 사례를 설명해 볼까 합니다.
지우가 태어날 때부터 덮었던 애착이불이 있습니다. 사실 이불이라기보다 고슴도치 같은 캐릭터가 하나 그려져 있는 겉싸개입니다. 갓난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를 씌우는 부분이 한쪽 모서리에 주머니처럼 만들어져있는 정사각형 모양의 이불이에요. 그 주머니부분 때문에 처음에는 "주머니 이불"(아마 엄마가 그렇게 알려준 것)이라고 불렀는데, 어느 날 스스로 "쭈먼~"이라는 약칭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몇 년 전부터는 "쭈쭈"라고 명칭을 바꿔서 지금까지 쭉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그 이불이 '주머니 이불'이었을 때는 분명 도구적 언어였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그 이불의 이름을 자신의 애정을 담아 "쭈먼"이라고 바꾸는 순간부터 지우는 "완구적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어요. 최종적인 명칭인 "쭈쭈"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이후에는 아예 "쭈쭈어"라는 새로운 언어체계를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했고, 일부는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앞 글자에 하이톤 악센트를 주면서 "쭈~쭈"라고 밝게 말하면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하더라고요. 지우는 도구적 언어가 뭔지, 완구적 언어가 뭔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본능에 따라 "도구적 언어"를 자기목적성을 가진 "완구적 언어"로 재해석했던 것이지요.
9살짜리 아이가 하는 거라면 우리도 당연히 가능한 일이며 어쩌면 매우 쉬운 일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독서모임을 할 때 저는 가급적 본인의 이름이 아닌, "스스로 정한" 닉네임을 쓰게 하고 있는데요. 이름이 가지는 자기규정과 타자성에서 벗어나 "자신이 직접 정한" 새로운 인격을 스스로 발견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름은 자기가 지은 게 아니잖아요. 보통 자기가 정하는 닉네임은 내 내면의 또 다른 인격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어요.
래디컬 러닝이란 언어 편중적 인간이 되어, 언어유희의 힘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다음 장은 "공부와 사고"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갑니다. 그전에 사고의 기초가 되는 언어가 무엇인지 깊이 있는 공부와 언어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열심히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공부의철학 -3
오늘은 2장 <공부와 사고>를 한번에 패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앞서 1장에서 공부하는 이유를 환경의 동조에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환경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평소에 사용하던 도구적 언어에서 벗어나 완구적 언어로 나아가야한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환경에 의존하는 것을 코드에 순응하는 것은 보수적인 것이며, 공부를 통해 체득하길 바라는 것은 ‘비판적’ 자세라고 말합니다.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닌 근거 있는 비판입니다. 다들 아시죠? ^^)
작가는 공부를 통해 자유로워지는 것이 재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판적 자세를 모든 상황에 적용하다보면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요?
2장에서는 언어를 통해 사고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츳코미(아이러니)와 보케(유머)입니다. 그 두 가지가 환경에서 자유로워져서 바깥으로 나가게 하는 본질적 사고 기술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아이러니와 유머는 기존의 상황코드를 전복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일부러 그렇게 하는 거잖아요. 쉽데 말해 뒤집어서 생각하기입니다. 이런 뒤집는 사고는 평소에 습관화되어 고착화된 자아이미지를 파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자기 자신이 일부러, 자기 자신에게 대항하여 또 하나의 재수 없는 자신을 언어적으로 만들어낸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 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언어유희를 통해 다른 풍부한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고가 바로 은유적 사고이며, 시인의 관점이 아닐까 싶네요.
이런 아이러니와 유머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결국엔 난센스(무의미)가 되고 마는데, 그런 난센스가 언어유희의 힘이 해방된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학의 언어를 예로 설명하는데요. 우리가 소설을 읽고 때론 무의미하게 느끼는 이유가 그런 기초를 본질적으로 깔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이야기로 빠진다면 애당초 소설을 왜 읽는가? 소설의 의미란 무엇인가? 나에게 의미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으로 이어져야 맞겠죠?
아이러니는 대화를 초코드화한다는 난해한 말을 적어놨는데,(일본스러운 표현입니다.) 은유적 정의를 말하는 듯 합니다. 사례로 든 문장은 “불륜은 악이다”라는 정의인데요. 이때 악이라는 표현이 초코드화된 정의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악’이란 무엇인가? 불륜이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으로 이어져야 하겠지요? 어쨌거나 철학이란 이런 아이러니의 방식을 통한 사고기술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언어라는 것은 현실 그 자체를 표현하는 수단이지만, 현실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러니를 통해 언어에 갇혀있는 현실을 끄집어내는 것이 철학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책에 소개된 이야기들은 오히려 좀 난해해서 제가 다른 사례를 하나 들어 볼까 합니다.
예컨대 “아픔”이라는 단어가 실제 상실을 통한 아픔, 삶의 무게가 주는 고통을 다 담을 수 없겠지요. 그저 대략의 무늬정도만 알 뿐입니다.
“아파서 웃음밖에 안 나온다”는 아이러니한 표현을 썼을 때 그 아픔은 최소한 일반적인 아픔의 수준을 뛰어넘는 그저 아프다는 말로 담을 수 없는 아픔의 크기를 조금 대변해 줄 수 있게 됩니다.
마침 오늘 낭독에서 4명의 제자를 다른 시기에 같은 나무를 보고 오라고 한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겨울에 나무를 보고 온 제자, 봄에 보고 온 제자, 여름과 가을에 보고 온 제자들이 설명하는 나무는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틀린 말이 아닌 “사실(fact)”이겠지요. 하지만 스승은 같은 나무를 보고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4명의 제자들의 경험을 통해 내가 한번 본 것으로 그것의 진실을 판단할 수 없다는 교훈을 알려줍니다. 그런 사고의 확장이 참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아이러니는 ‘근거를 의심하는’ 것이다.
*유머는 ‘시각을 바꾸는 것’이다.
다음은 유머차례인데요. 유머부분은 사실 잘 와닿지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유머라는 단어가 가진 도구적 해석에 저부터 갇혀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고요. 확장적 유머와 감축적 유머 2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결론은 그 사이에 적정한 유머의 수준을 스스로 이해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재해석해보자면, 유머란 “상황을 재해석하는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재해석의 방향에 따라 확장적 유머는 지금의 상황, 문제, 이야기 등의 범주를 넓혀서 바라봄으로써 비트는 것이고, 감축적 유머는 그 범주를 아주 작은 포커스로 좁혀서 비트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고 책을 읽으면 조금은 수월하지 않을까 싶네요. ^-^
#공부의철학 -4
뒤로 갈수록 앞장에서 언급했던 내용이 반복되는 느낌이 듭니다. 아무래도 같은 책을 천천히 읽다보니 마주치는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일단 결을 이렇게 잡았으니 최소한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고자 하나 오늘 읽은 부분은 집중력이 다소 떨어지는 지점이 많았지만, 핵심적인 부분만 간략히 집고 넘어가 보겠습니다.
공부의 유한화까지는 어제까지 깊이 다루었고요. 오늘은 아이러니와 유머를 ‘지나치게 깊이 파고들기’와 ‘한눈팔기’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를 합친 “깊이 파고들어가다 보면 한눈팔기가 자주 일어난다”는 문장이 재미있습니다.
독자의 스카마에 따라 깊이 파고들수록 생각의 곁가지들이 자라나게 됩니다. 비슷한 내용을 언급했던 책, 내가 경험했던 이야기, 어느 영상에서 봤던 내용 등 다양한 스카마가 달라붙습니다. (강의 때 속독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 부분이 이 때 활용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깊이 읽고 쓰고 있는 책이 뼈대라면, 함께 연관되어 읽게 되는 다른 책은 피가 되고, 다른 분들이 올리는 글은 살이 되어 줍니다.)
이번 챕터에서는 궁극적인 공부의 끝장을 보려고 하다가 인생이 끝장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진정한 모습으로 만들어줄 최고의 공부 따위는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이 내용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마인드셋>의 저자 캐록 드웩 교수는 성장형 마인드셋과 고정형 마인드셋의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조각(彫刻)’으로 인식하느나, 아니면 ‘소조(塑造)’로 인식하느냐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나라는 존재의 가치가 이미 정해져있다고 생각하면 정해진 재료 안에서 최상의 결과를 조각하듯 깎아 내야만 하겠죠. 그리고 실수라도 해서 잘못 깎아버리면 그건 작품으로써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흔히 말하는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발상이 그런 관점과 비슷할 것 같아요.
반대로 소조는 찰흙으로 모형을 만들듯이 소재를 덧붙여가면서 중간에 수정하고 잘라내기도 하고 다시 붙이기도 하면서 점점 완성도를 높여가는 방식인데요. 성장형 마인드셋이나 이 책에서 작가가 말하는 논점의 방향이 그거죠. 정해진 최고의 자아상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못난 나로 살았더라도 오늘 성장을 통해 어제보다 조금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저는 미련해서 이런 단순한 삶의 진실을 깨닫는데 거의 40년 가까이 걸린 것 같아요.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인생은 재료를 축적하고, 그것으로 나다운 삶의 모형을 빚어가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결단”을 환경적 코드에 “동조”하는 것의 대척점으로 보고 있는데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결단은 좋은 의미인데 여기서는 아닙니다. 일단 아이러니를 통해 뒤집어 보는 결단까지는 좋지만 “결단”이라는 것 자체가 내가 내린 한 가지 결론의 절대화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결론이 ‘절대화’되는 순간 그것 역시 내가 아닌 타자가 되기 때문이죠.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는 일반적인 타인이 아닌, 내가 아닌 모든 것을 ‘타자’로 규정하고 있고, 내가 내린 하나의 결론도 타자이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절대복종이 되는 거라고 설명합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애당초 결단을 내리게 만든 어떤 근거가 애당초 타인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러니의 비판성을 살려두려면 절대적인 것을 추구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어요.
쉽게 말하면 내 생각이나 나의 현재 결론을 임시로 믿긴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더 나은 방향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여기까지로 깔끔하게 끝나면 좋겠지만, 무의미에 대한 집착이라든지 자신의 욕망 연표를 만드는 사례까지 등장하는데요. 이 부분은 더 궁금하신 분들만 직접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
#공부의철학 -5
공부의 기술로 처음 언급하는 내용은 “종이책 읽기”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저가가 쓴 종이 책은 검색해서 금방 나오는 인터넷 정보보다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제대로 된’ 책을 읽은 것이 공부의 기본입니다.
어떤 분야든 그 분야의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서 처음 읽게 되는 책은 입문서인데, 그런 입문서는 공부의 범위를 ‘임시로 유한하’하는 것입니다. 어느정도 알아야 하는지 대략적인 범위를 파악하고 전체적인 감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작가가 권하는 것은 입문서를 여러권 읽고 비교해 보는 것을 추천하고 있어요. 한권만 읽고 맹신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철학에 입문한다고 생각하면 처음에는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입문서로 독해력을 길러나가는 것만으로도 벅찰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 기본서가 되는 그 분야의 ‘교과서’격인 책을 사두고 종종 사전처럼 참고하는 용으로 보라고 말합니다. 이런 디테일한 사용법은 참 실용적인 접근이 아닐 수 없어요.
우리는 책을 읽을 때 내가 모르는 내용을 읽기만 하면 다 이해할 수 있을거라 착각하곤 합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죠.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배경지식(스키마)가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걸 읽어도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빠짐없이 모든 것을 읽고 이해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공부의 가장 큰 방해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저자는 입문서를 읽고 기본서를 참고하며 읽어가는 동안에는 여기저기 모자이크된 형태로 읽은 상태가 된다고 말하고 있어요. 입문서를 기본으로 서서히 지도를 색칠해가는 느낌이라고 말이죠.
저는 공부를 하는 과정이 지뢰찾기 게임과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우연히 블럭 하나를 누르면 어디에 몇 개의 지뢰가 있는지 힌트가 나오죠. 어떤 곳은 쉽게 지뢰를 발견하고 금세 지도를 확장해갈 수 있지만, 어떤 곳은 촘촘히 놓여있는 지뢰를 찾기 위해 골똘히 생각해야하는 시간도 필요하잖아요. 하지만 확실하게 지뢰를 찾고 나면 그 주변을 빠르게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것처럼 공부도 전체 그림과 윤곽을 잡아가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공부는 새로운 표현(사고방식)에 동조함으로써 자신이 몰랐던 새로운 ‘감각이 확장’되는 경험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알던 것이 깨지는 과정(자기파괴)이 처음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낯설고 힘든 경험일 수 있지만, 익숙해질수록 신나고 기분좋은 경험으로 변하게 됩니다.
공부는 ‘정보의 유한화’라고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었죠. 제가 독서하는 방식에 빗대자면 정보의 유한화는 나에게 잘 맞는 책을 “재독”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야를 새롭게 공부할 때 무작정 많은 책을 읽는다고 빨리 지식이 늘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분야의 책 중에서 나와 아주 잘 맞는 책(입문서/기본서)을 여러 번 읽음으로써 유한화 된 정보의 축을 먼저 만들고 나면 이후에 다양한 지식을 접할 때 훨씬 깊이 있는 접근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때 우리가 공명하는 것은 그 내용 자체가 아니라, 스타일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스타일이 맞는 책이 나에게 가장 좋은 교사가 되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읽는 것은 텍스트의 짜임새인 ‘구조’를 분석하는 일입니다. 조금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맥락(context)를 파악하는 일이라고 이해해도 좋습니다. 어떤 설정이나 구조 속에서 언어(개념)의 기능을 파악하는 것이죠. 이렇게 읽는 상태를 택스트를 “내재적으로” 읽는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개념을 접하게 될 때 우리가 취해야할 가장 좋은 태도는 자신의 기존 언어 사용법을 기본으로 삼되, 그 효력을 반으로 줄이고, 나머지 반은 텍스트의 내재적인 새로운 의미로 치환하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면 어떨까요?
작가는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대충’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궁극의 이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충의 이해와 정확한 표현을 구별하여 인식하고 내가 이해한 텍스트의 특정부분에 제대로 결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해는 대충하지만, 근거는 정확히 기억해야 한다 이런 뜻 아닐까요?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요.
그래서 저자는 정확한 기억을 위해 독서할 때 메모나 아이디어는 우선 손으로 적고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노트앱(에버노트 등)에 전송한다고 합니다. 수기와 디지털을 왔다 갔다 하는 상태를 이상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 부분은 저도 무척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공부는 어쩌면 철저히 개인적인 사유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는 ‘무의미함’에 맞닿아있는 잡념에 ‘비의미적 형태’의 번득임이 서려있으며, 자유로운 공부란 의미와 무의미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타자는 공부를 계속하는 타자입니다. 기본적으로 완벽한 공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부는 책 몇 권을 읽고 마치 다 아는 것 인 냥 떠들 수 없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공부와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그들의 기본적인 자세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많지만, 여전히 완벽한 건 아니야라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처럼 새로운 공부를 통해 이전에 내가 알던 지식과의 정보 비교를 계속하는 사람들은 어떤 ‘지적인 사호 신뢰의 공간’에 속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연구’이자 가장 딱딱한 말로 ‘학문’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공부를 계속하는 사람끼리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교류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에는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친구가 교사보다 오히려 더 필요한 존재라는 겁니다. 이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내 생각을 받아주고 이해해줄 친구들이 있으면 훨씬 공부는 흥미를 더하게 되고, 더 깊이 있는 전진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 이런 멋진 마지막 문장을 남겼네요.
“동조 그대로의 동조와 지가 목적적인 동조를 즐기는, 다가올 바보끼리, 서로의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무의미를 울리는, 공부의 대화가.”
* 참고로 이책의 원서 부제를 해석하면 "다가올 바보들을 위하여"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