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숨 쉬는 것조차 감사하게 만드는 '소울'풀한 작품

영화 소울에는 주인공이 없다.

by 변대원

살아가다 보면 육체의 소리에 따라 행동할 때도 있고, 마음의 결심에 따라 행동할 때도 있고, 영혼의 울림에 따라 행동할 때가 있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게 된 모든 순간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어제 문득 사무실 정리를 해야겠다고 느꼈다. 누가 오는 공간도 아니고, 나 혼자 쓰는 공간이기에 아무렇게나 있어도 상관없을 것 같지만, 영혼의 작은 속삭임이 있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그래서 무작정 시작했다. 그렇게 1시간 정도 지나자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이거 수습이 안 되는 일을 저질렀구나.'


육체의 소리도 들렸다. 허리도 아프고, 먼지 때문에 목도 칼칼해져 온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꼬박 하루 넘게 걸려 정리가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어수선함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쯤 모임에서 함께 보고 이야기하자던 영화가 떠올랐고, 그렇게 다시 어떤 이끌림에서인지 <소울>을 보게 되었다.


다들 그렇겠지만, 나 역시 삶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에 스스로 인생을 일부러 이렇게 프로그래밍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 운명이 사실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옵션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마치 영화 속 ‘22’처럼 스스로 고집불통이라 그걸 극복하려면 지금의 내 삶과 같은 형태의 시련과 고난 정도는 있어야 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은 아닐까?


영화 소울은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이상 그 너머를 보게 만드는 영화라 특별하다.

나만의 가치, 나만의 재능, 나만의 삶의 의미를 너머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삶이 얼마나 각별한 것인지를 알려준다.


주인공 조는 불운한 삶을 산다. 재즈 피아노 연주로 자신의 삶을 증명하고자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고, 자신의 삶은 무의미하게 흘러갔다고 여긴다. 그리고 자신을 증명할 일생 최대의 기회를 얻은 날 그만 죽고 만다. 이 영화가 좋았던 건 그저 자신만의 꿈을 간절히 추구하던 주인공이 마침내 그 꿈을 이루는 것을 이야기하는 스토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꿈을 이루기 직전에 죽은 주인공이 ‘22’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만나면서 오히려 자신의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는 스토리가 전개된다.

영화의 절반까지는 조의 시점에 몰입해서 보게 되지만, 어느 순간 오히려 22에 몰입하게 되고, 나중에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조가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라는 생각이 들고, 더 확장해서 내 삶을 살아가는 중인 바로 내 이야기라는 것을 느낀다.


영화에서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후세계(Great beyond)는 직선으로 이어진다. 마치 우리의 삶이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음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리고 주인공 역시 자신의 꿈을 이룰 기회를 잡기 위해 그 이외의 시간들이 주는 의미들을 누리지 못한 채 목표를 향해 직진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반면 조의 몸으로 지구에 온 22는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다. 죽음과 생명 ‘사이’에서 수천 년간 머물다 인간으로 다시 ‘존재’하기에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새롭게 받아들인다. 육체는 같지만 그 속의 영혼이 달라짐에 따라 삶을 느끼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 것이다.


영화 도입부에 조가 죽는 장면 역시 하나의 은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죽을 뻔한 수많은 위험들을 몇 번이나 넘기는 동안에도 정작 자신이 잡은 기회만 생각하다 결국 맨홀에 빠져 죽고 마니까. 그건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꿈)은 무척이나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는 법이다. 평생 꿈꾸던 연주를 마치고 나온 조에게 도로시가 말해주는 아기 물고기와 나이 든 물고기의 짧은 우화는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삶의 진실을 은유로써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물속에 있다. 인생은 꿈을 달성하는 순간에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삶이 꿈 그 자체인 것이다. 문득 장자의 제물편에 나오는 호접지몽(胡蝶之夢)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리가 익히 아는 나비가 되는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제자가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의 이야기는 실로 그럴듯하지만 너무나 크고 황당하여 현실세계에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자 장자가 제자에게 말했다.

“너는 쓸모있음과 없음을 구분하는구나. 그러면 네가 서있는 땅을 한번 내려다보아라. 너에게 쓸모 있는 땅은 지금 네 발이 딛고 서 있는 발바닥 크기만큼의 땅이다.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땅은 너에게 쓸모가 없다. 그러나 만약 네가 딛고 선 그 부분을 뺀 나머지 땅을 없애버린다면 과연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작은 땅 위에 서 있을 수 있겠느냐?”


이에 제자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자 장자가 다시 말했다.


너에게 정말 필요한 땅은 네가 디디고 있는 그 땅이 아니라 너를 떠받쳐주고 있는, 바로 네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나머지 부분이다.”


사실은 물속에 살고 있으면서 바다를 찾고 있는 어린 물고기나 ''라는 좁은 인식 속에서 살아가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장자의 제자들의 모습이 지금 나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정작 내가 가치 있게 대해야 하는 사람들, 내가 가치 있게 보내야 했을 시간들을 못 보고 지나간 건 아닌지.


조가 주인공이고, 그래서 그의 꿈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영화 소울에는 주인공이 없다.

어린 나이에 소울 아티스트의 풍모를 풍기는 코니도, 원래는 수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이발사가 되어 사람들을 멋지게 만들어주는 일을 행복해하는 데즈도, 수천 년간 삶과 죽음 사이에 방황하다 인간으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22도, 매일 밤 혼신의 연주를 반복하는 거장 도로시도, 바느질은 영혼을 치유한다는 포스터를 걸어놓고 옷 수선을 하는 조의 어머니도 사실은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 역시.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더 귀하게 느껴지는 밤이다.

우리의 영혼은 모두 연결되어 있기에.



*이 장면을 보며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의 <이것은 물이다 This is water>라는 책이 떠올랐다. 비슷한 비유가 나오지만, 영화에서 언급된 내용과는 또 다른 의미(혹은 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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