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규정함에 있어 어려움을 느낀다. 오랜 시간 우리가 받아온 교육은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고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는 방법을 배우는 대신, 정해진 답에 맞추도록 훈련받아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 자신의 가치는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좀 허무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냥 자신이 정하면 된다.
예컨대 내가 가진 물건을 하나 판다고 생각해 보자. 그 물건 가격은 내가 정하기 나름 아닐까?
물론 너무 비싸면 아무도 사지 않겠지만, 가격을 정하는 건 내 마음이니까. 같은 원리다.
내 존재 가치는 자신이 정하는 거다. 1억이든 100억이든 1조든 상관없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그 가치의 크기가 아니다.
그걸 누가 정하느냐다.
서두에 표현한 것처럼 적어도 내 가치의 입찰가는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삶에 대한 하나의 책임이자 상징인 아닐까?
적어도 내가 어떤 삶을 살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갈지는 스스로 정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도 연결되는 이야기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이런 질문으로 바뀔 수도 있다. "나는 누가(무엇이) 되고 싶은가?"
도대체 스스로 그걸 정하지 않는다면 누가 정해준단 말인가! 타인이 정한 규정 안에서 늘 탈출하고 싶어 하면서도 여전히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려는 노력도 시도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누군가에게 규정된 내 속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혹은 성장해오면 겪은 여러 가지 일들과 경험을 통해 스스로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있거나.
결과적으로 말하면 나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나 스스로 내가 원하는 자아상을 선택할 수 있고, 확장하거나 축소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스스로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갈지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거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는 <전체성과 무한>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아가 자신의 변화들 속에서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사실 사유하는 자아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 귀 기울이고, 자신의 심오함에 놀라며, 그래서 자기에게 타자가 된다."
나(자아)라는 존재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나의 집합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내 내면의 여러 모습들을 마치 타자처럼 바라볼 수 있으니 말이다. 왜 같은 나이면서도 우리는 전혀 다른 내가 되곤 하지 않는가. 스스로 좋아하는 내 모습이 있는 반면, 싫어하는 내 모습도 있는 것처럼. 그런 하나하나의 나의 모습이 분리된 내가 아니라, '나'라는 마을 속에 함께 살고 있는 나의 속성들이라고 이해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내 속에 있는 내 모습 중 일부만을 인정하고 일부만으로 살아가려 애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런 성향이 삶을 부자연스럽고 부자유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자아의 속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헤세의 소설에 나오는 데미안의 모습에서, 혹은 카잔차키스의 소설에 나오는 조르바에게서 우리는 묘한 끌림을 느낀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보여주는 자유로움에 있지 않을까? 스스로를 억압하거나 누군가의 규정에 갇혀있지 않고, 스스로 자신과 세상을 규정하고 살아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나는 내게 주어진 환경을 무척 사랑하지만, 한편 그 속에 갇혀 있는 나 자신에 대한 갑갑함도 동시에 느낀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과연 인생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그 인생의 숙제 앞에 놓여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