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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가 한번쯤 만나봐야 할 책들
#_나는 투표했다 (류시화)
시의 행간에서 숨을 멈추는 당신에게
by
변대원
May 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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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첫 민들레에게 투표했다
봄이 왔다고 재잘대는 시냇물에게 투표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지저귀며
노래값 올리는 밤새에게 투표했다
다른 꽃들이 흙 속에 잠들어 있을 때
연약한 이마로 언 땅 뚫고
유일하게 품은 노란색 다 풀어 꽃 피우는
얼음새꽃에게 투표했다
나는 흰백일홍에게 투표했다
백 일 동안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것이
백 일을 사는 방법임을 아는 꽃에게 투표했다
두 심장 중에서 부서진 적 있는 심장에게 투표했다
부적처럼 희망을 고이 접어
가슴께에 품는 야생 기러기에게 투표했다
나는 잘린 가지에 돋는 새순의 연두색 용지에 투표했다
선택된 정의 앞에서는 투명해져 버리는
투표용지에 투표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와 '네가 틀릴 수도 있다' 중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에 투표했다
'나는 바다이다'라고 노래하는 물방울에게 투표했다
나는 별들이 밤하늘에 쓰는 문장에 투표했다
삶이 나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내가 삶에게 화가 난 것이라는 문장에,
아픔의 시작은 다른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그 아픔 끝내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문장에,
오늘은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이라는 문장에 투표했다
내 가슴이 색을 잃었을 때
물감 빌려주는 엉겅퀴에게 나는 투표했다
새벽을 훔쳐 멀리 달아났던 스무 살에게,
몸은 돌아왔으나 마음은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사랑에게 투표했다
행복과 고통이 양쪽 면에 새겨져 있지만
고통 쪽은 다 닳아 버린 동전에게 투표했다
시의 행간에서 숨을 멈추는 사람에게 투표했다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류시화/수오서재) 중에서
올해 읽었던 시 중에서 가장 많은 문장에서 숨을 멈추고, 신음하고, 소리지르고, 책을 덮었던 시였네요.
짧은 시 하나에 이토록 많은 삶의 고민들이, 흔적들이, 방황들이
느껴지다니 참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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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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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꼭 끝까지 읽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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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브릿지 대표. 사이책방, 스티브 디자인 운영. 저마다의 꿈을 이루는 독서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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