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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May 12. 2023

#_우리는 모순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책곰's 좌충우돌 사색노트

저는 독서를 강의할 뿐이지만, 독서의 원리에서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길 기대합니다.

오늘은 독서 이야기로 출발해서 조금 더 깊이 있는 우리 생각의 4가지 모순된 조각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1) 빠름과 느림

2) 선과 악

3) 부와 가난

4) 낮과 밤



1) 빠름과 느림


우선 독서에 대해 가장 모순적인 상식은 "책 읽는 속도"입니다.

이렇게 질문을 드려볼게요.

책을 빨리 읽는 게 좋을까요? 느리게 읽는 게 좋을까요? 

많이 읽는 게 중요할까요? 아님 깊이 읽는 게 중요할까요?


답은 그때그때 다르다입니다.

빨리 읽어도 충분히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면, 당연히 빨리 읽는 게 좋겠지요? 하지만 빨리 읽어봐야 이해를 못 한다면, 느리게 읽는 게 더 나을 겁니다. 하지만 꼭 속도를 한 가지로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요?

빠르고 느린 것 모두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나 그 질문이 의도하는 방향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질문의 맹점은 책을 읽는 방식을 빨리 읽거나 느리게 읽는 2개의 세상으로 제한해 버린다는데 있습니다. 그런 함정에 빠지면 곤란합니다. 우리에게는 평범한 독서를 넘어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서의 새로운 통찰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이분법적인 세상의 편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2) 선과 악


완벽한 선과 완벽한 악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선함으로 규정해 버리면 이후에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건 실망뿐일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선의 기준이 다를뿐더러 그 사람이 나의 기준에 맞게 살아야 하는 어떤 이유도 없으니까요. 그저 내가 혼자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일만 생길 뿐이죠.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연예인들의 불편한 기사들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기사에서는 그들의 "악함"과 "잘못"에만 주목합니다. 그러나 어떤 잘못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악함" 그 자체는 아닐 겁니다. 흔히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성경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지만 아래와 같은 구절은 있습니다.


의심을 품는 사람들을 동정해 주고 죄악의 불구덩이에 빠진 사람들을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또 본능적인 욕정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욕정으로 더럽혀진 그들의 속옷까지도 미워하되 조심스럽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공동번역 성경, 유다의 편지 1장 22~23절)


그들의 속옷까지 미워하되 조심스럽게 자비를 베풀라는 말이 참 인상적입니다. 중요한 건 어떤 사람이든 그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선-악으로 단정 짓는 우를 범해선 안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권하고 싶은 것은 연예인들의 가십 자체에 관심을 끊는 것입니다.ㅎㅎ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부자걱정, 연예인걱정...)


어리석은 사람은 위선적이기 쉽고, 현명한 사람은 위악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은 필연적으로 위선으로 전락하기 쉬운 반면, 의도적으로 타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에게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꼭 필요한 배려를 통해 관계가 개선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3) 부와 가난


부와 가난은 물질적, 정신적 풍요함의 크기를 말합니다. 여기서 '풍요함'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주셨으면 합니다. 단순히 돈의 크고 작음으로 부와 가난을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의 많고 적음으로만 부와 성공을 재단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편인데요. 부자라서 나쁜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주 잘못된 편견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우선 이 내용은 번역의 잘못되었습니다. 발터 크래머의 <상식의 오류사전 2>에 따르면 아람어 원문에서 밧줄은 gamta, 낙타는 gamla인데, 번역하는 과정에서 t를 l로 착각하여 밧줄을 낙타로 번역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문맥상 얇은 실이 아니라, 두꺼운 밧줄이 바늘귀로 빠져나간다는 표현이 훨씬 자연스러운 비유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낙타가 밧줄로 바뀐다고 해서 쉬워지는 건 아니겠죠. 이젠 그 문장뿐 아니라, 해당 에피소드를 조금 더 넓게 살펴봅시다.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남을 속이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들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선생님,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공동번역 성경, 마르코의 복음서 10장 17~25절)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부자가 아니라 "욕심"입니다.

예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어본 사람은 삶의 진정한 풍요로움과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가지기 위해 계명을 다 지키면서 살았던 것이죠. 하지만 예수는 그의 마음을 간파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보화를 얻게 된다고 말이죠. 그 얘기를 들은 그 부자는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정한 부자라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기쁨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니 부를 이룩하는 방식 자체가 자신이 세상에 제공하는 가치가 커서 타인에게 더 큰 기쁨을 주는 방식이면 됩니다. 처음 언급한 것처럼 부는 물질을 단순히 소유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풍요함의 크기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예수에게 영생을 질문했던 부자는 영생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영생은 이렇습니다. 내가 가진 가치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다음 시대를 살아갈 후손들의 좋은 영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가치가 더 큰 가치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이지요. 저는 이것이 영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나라는 한 개체의 영원성이 아닌, 내가 연결된 전체가 누리는 지속성인 셈입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생각했던 것처럼 한 개인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는 말은 개인의 부귀영화라는 욕심에 치우쳐있는 상태로 하느님의 나라(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철강왕 카네기는 당대 최고의 부자였지만,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수치"라고 말하며 자신이 이룩한 부를 남은 생애동안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그런 철학으로 인해 창출된 가치는 어마어마합니다. 5,600만 달러를 들여 2,500여 개의 공공도서관을 세웠고, 카네기 공과대학(현재 카네기멜론대학)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하여 은퇴 후 18년 동안 3억 5천만 달러를 기부와 자선에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다른 기부와 자선에 따른 것과는 별개로 그가 세운 도서관과 대학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을지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 (제가 가장 닮고 싶은 부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부자였지만, 은퇴하고 죽을 때까지 자신이 얻은 부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사용하는 내내 천국을 경험했을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천국은 내가 착한 일을 해서 죽고 나서 도달하는 구름 위의 세상이 아닙니다. 천국은 육체의 삶이 끝날 때 그 일생의 선악을 저울질해서 도달하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영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지상과제입니다. 즉, 이전에 낡은 나를 버리고(죽음), 더 나은 차원의 새로운 나로 부활(거듭남)함으로써 성장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바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돈이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진 가치를 통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을 줄 수 있는가가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참된 풍요로움이자 충만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 이미 그것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기뻐할까, 어떻게 더 좋은 것을 줄까 늘 생각하지요. 그렇게 사랑이 충만한 상태가 바로 천국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했는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매우 철학적인 책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 어려운 긴 동화책처럼 읽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조금씩 성장하고, 철학과 인문학 책을 읽은 뒤에 다시 만난 성경은 전혀 다른 책이었습니다. 예수의 비유는 여전히 우리의 일상과 삶을 관통하는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단순히 돈의 크기로만 부를 이해합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부와 가난은 물질적 혹은 정신적 풍요함의 크기로 결정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부터 풍요로움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4) 낮과 밤


낮은 해(日), 밤은 달(月)로 상징됩니다. 그리고 해는 양(陽, 햇빛), 달은 음(陰, 그늘)으로 해석됩니다.

그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음양은 어디까지나 기(氣)의 두 측면, 두 계기인 것인데, 음양은 서로 대립하고 의존하면서 사물을 만들고 성립시키는 생성과 존립의 원리, 서로 순환하고 전화하는 변화의 원리라는 두 개의 원리로써 작용하여 왔다. 그러나 음양 원리의 상호 의존적, 조화적인 성격이라는 해석은 음양이 모순 원리로써 성장ㆍ발전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과는 상치하게 된다.  - [네이버 지식백과] 음양 [陰陽] (철학사전, 2009)


여기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음과 양이 설 대립하고 의존한다고 되어있는데, 사실 해와 달은 서로 대립하지도 의존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해석할 뿐이지요. 물론 원리를 이해하는 방식으로써는 매우 탁월하지만, 원리가 세상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수학공식이 수학 그 자체가 아닌 것처럼 말이죠.

"음양 원리의 상호 의존적, 조화적인 성격이라는 해석은 모순 원리로써 성장, 발전하고 있는 해석과 상치된다"라고 나오는데, 우리는 이 모순적이고 상치적인 상황에서 비로소 더 큰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진석 교수는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철학의 본질을 밝을 명(明)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명(明)'자에는 해(日)와 달(月)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대립된 두 존재가 개념적으로 하나가 된 것이지요.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을 '지(知)'라고 하는데, '명'자는 그런 구획되고 구분된 '지'를 뛰어넘어 두 개의 대립면을 하나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해와 달, 즉 대립이 공존하는 상태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공존할 수 없는 모순적인 상황을 더 넓은 시각, 더 높은 차원의 생각으로 헤아리는 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언어 자체가 한계가 명확하고, 우리는 자신이 가진 언어만큼만 표현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 세상 혹은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에 가까울수록 모순적이게 됩니다. 모순적인 것을 더 큰 덩어리로 이해할 만큼 내 사유의 그릇이 커지는 것이 성장인 것이죠. 앞에서 말한 "빠름과 느림", "선과 악", "부와 가난" 역시 두 가지의 상반되는 양면성을 통해 우리는 조금 더 큰 생각의 틀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힘입니다. 세상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질문하는 힘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 역시 철학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철학책은 그것을 철학자의 관점과 언어로 다시 들여다본 결과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철학이 아니라, 우리가 나와 세상을 들여다보고 고민하고 질문하는 것 역시 철학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순을 통해 성장합니다. 모순이란 지금 내 수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모순적 상황에서 우리는 넘어지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머뭇거리기도 합니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다면, 이 모순적인 상황에서 더 큰 이치를 발견하는 것이죠.

"그저 열심히 공부한다고 좋은 성적을 받는 게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말이죠.

돈이 많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서 복권을 샀는데 당첨이 되면 행복할 일만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대부분의 복권당첨자들은 그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거나 주변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수많은 트러블을 겪으며 불행해지는 일을 보게 됩니다. 분명히 돈은 많아졌는데, 더 불행해지는 이 모순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더 큰 이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먼저 부자의 그릇을 갖추어야 그 그릇의 크기만큼의 부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내 그릇보다 너무 큰 것을 담으면 오히려 그릇이 깨져버릴 수 있다"는 통찰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작은 이치를 탐구해 나갈 뿐, 모든 세상의 이치나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제가 오늘 이 글을 통해서 전하려는 메시지 역시 저의 생각 자체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가 생각하는 방식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조차도 모순일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 어찌 세상의 이치를 논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ㅎㅎ 하지만, 성장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순되지만 그 모순된 것들을 통해서 전진하는 것 말입니다.


실패를 통해 성공을 배우듯이, 우리는 모순을 통해 성장을 배웁니다.

오늘도 부단히 읽고 쓰면서 세상에 더 나은 가치로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따름입니다.



* 매일 책 속에서 발견한 좋은 문장을 나눕니다.

* 오늘 인용한 성경은 <공동번역 성서>을 참고하였습니다.

* 오늘 문장은 최진석의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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