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속독의 알고리즘 2 : 속독은 죄가 없다
속독을 위한 변론
저는 책을 빨리 읽는 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속독"을 할 줄 안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군요.
맘먹고 많이 읽으면 하루에 10권도 넘게 읽을 수 있습니다.(물론, 동화책은 아닙니다. ^^)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루에 10권 읽으면 10권의 내용 다 기억 못 합니다. (저는 우영우가 아니라서..^^) 그렇다고 그렇게 읽는 게 의미가 없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상당히 의미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천천히 10권 읽으면 10권 내용을 다 기억하나요? 당연히 다 기억 못 하겠지요. 어차피 기억하지 못할 내용이라면 빨리 보는 게 조금 더 낫지 않을까요? ㅎㅎㅎ
실제상황을 한번 비교해 볼게요. 한 달에 한 권씩 10개월에 걸쳐서 책을 10권 읽었다고 해볼게요. 10권째 읽을 때는 처음 읽은 책이나 2번째 3번째 읽은 책은 아예 기억 속에서 멀어져 오래된 추억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하루에 10권을 읽으면, 세밀한 부분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10권의 책이 짧은 시간에 상호작용해서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거든요. 중요한 건 그런 생각이나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에 10권도 좋고, 한 달에 10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짧은 시간 안에 나에게 필요한 지식들을 공급해 주면 우리의 뛰어난 뇌는 그런 양질의 지식에 반응해서 나를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로 업그레이드시켜줍니다.
아시겠지만, 성공한 분들 중에 속독을 중요하게 말씀하시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한결같이 책을 많이 읽으라고는 조언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독서를 운전이나 교통수단에 비유를 많이 하는 편인데, 이런 느낌입니다.
"빨리 가지 않아도 괜찮아. 그런데 최대한 많은 곳을 여행 다녀봐"
맞습니다. 빨리 읽지 않아도 됩니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건 많이 읽는 거니까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에게 속독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깊이 없는 독서에 매몰될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속도라는 기능이전에 책과 진지하게 만날 수 있는 방법과 태도부터 배우는 게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속독을 포함한 독서의 전체 알고리즘을 이해시키는 건 어마무시하게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읽을 줄 알면 많이 읽는데 훨씬 유리하지 않을까요?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는 말도 있는데요, 여행에 빗대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걸어가는 방법 밖에 모른다면, 해외여행이 가능할까요? 가까운 일본은 고사하고 제주도조차 갈 수 없겠죠. 그런데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면 그게 바로 목적지 앞까지 가진 않더라도 아주 빨리 목적지 근처까지 갈 수 있게 도와주잖아요. 바로 그겁니다. 속독을 한다고 그 독서가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을 전부 가져다 주진 않아요. 하지만 속독을 통해 더 빨리 내가 원하는 것 근처까지는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단번에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빠르게 간다고 끝이 아니잖아요. 제주도 공항에 도착해서 렌트를 하든, 버스를 타든 해서 원래 가고자 했던 장소까지 이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속독을 정말 좋아하지만, 속독으로만 끝나는 독서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처음 버스 타고 비행기 타면 신기하지만,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 일상이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나 버스 탈 줄 알아, 나 비행기 탈 줄 알아." 이런 느낌이랄까요. 다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독서의 비행기는커녕 독서의 자전거도 안 타본 분들이 대부분이라 처음에는 이런 빠른 독서부터 강의해 드리는 것이지요. 저는 느린 독서보다 항상 속독을 먼저 강의합니다.
지식의 세상을 걸어만 다니다가 버스도 타보고, KTX도 타보고, 비행기도 타보면 분명 새로운 경험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행기는 내가 가려는 제주도의 어느 작은 카페 앞까지는 가지 않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결국에는 다시 버스도 갈아타고, 걸어서 그 카페까지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속독 자체가 독서의 본질은 아니라는 사실을요. 속독의 목적은 다독이고, 다독의 목적은 더 넓은 시야로 나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니까요. 때로는 자전거를 타고 전국일주를 하는 것이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가치가 있을 테니까 말이죠. 그래서 시집이나 철학책을 속독으로 한번 읽고 만족하는 것은 마치 마라톤 코스를 뛰어서 가지 않고 자동차로 한 바퀴 쓱 돌아본 다음에 마라톤을 완주했다고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어쨌거나 여행을 제대로 하려면 일단 자전거든 버스든, 비행기를 탈 줄 알아야 하는 거잖아요. ^-^
그래야 우리 진짜 여행이든 독서여행이든 더 풍성해지고, 즐거워지는 건 당연한 이치니까요.
자, 속독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이겁니다.
사람들이 빨리 읽고 많이 읽는 것에 집착해서 독서의 본질을 잊어버린다는 점이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저 많이만 읽으면 좋은 줄 알고, 양에만 집착하던 시기도 있었으니까요. 의미가 없진 않았지만, 돌아보니 애써 부산까지 가서 꼭 만나야 하는 친구도 만나지 않고 다시 서울로 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어쨌거나 제 경험에 비추어 굳이 죄를 묻는다면, 충분한 노력 없이 빨리 성과를 내고 싶은 저의 못난 마음이었을 겁니다.
부디 여러분은 독서의 본질만 잊지 마시고, 속독을 잘 활용해 보세요. 당신의 독서가 훨씬 더 풍성해지고, 자유로워질 테니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