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저는 애석하게도 제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과를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건축공학도가 꿈이었거든요.
고3 때 그동안 친 수능점수 중에 가장 좋은 성적을 받았음에도 과감하게 소신지원하고 모두 다 불합격 한 뒤 당연한 듯 재수를 시작했었습니다. 이듬해 3월부터 다시 재수공부를 시작하면서 문과로 전향했는데, 수능 이후 3개월을 신나게 놀았음에도 문과로 전향했기 때문인지, 기존 최고점수보다 7점이나 더 높게 받으면서 역대 개인 최고점을 갱신하기도 했습니다. (대단한 것처럼 말했지만, 그래봐야 272점입니다)
나는 전형적인 문과 체질이구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잘했던 과목이 언어영역과 사회탐구영역에 집중 포진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고3 때와 재수하던 시기에 단편소설도 각각 한편씩 썼었네요. (전 왜 이과를 간 걸까요 ㅋㅋ 이래서 메타인지가 중요한가 봅니다.)
개인적으로 성적이 오른 결정적인 계기는 고3 8월에 있었던 아주 단순한 깨달음 덕분이었는데요.
"수업을 듣는 건 공부가 아니다"라는 단순한 통찰이었는데, 수업을 듣는 것 자체가 공부가 아니라, 내가 그동안 모르던 것을 아는 걸로 바꾸는 과정이 공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저는 문과로 전향하고 제 공부에 대한 메타인지적 깨달음을 얻은 덕분에 재수하며 성적이 많이 올라 한양대 경영학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면 숫자는안 봐도 될 줄 알았는데 경영의 핵심은 숫자라는 걸 그땐 몰랐습니다. 통계와 회계수업도 그 시절엔 왜 그리 재미없었는지 듣는 둥 마는 둥 했었고요. 학점도 다 꽝이었습니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숫자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세일즈 하던 시절 모든 성과는 오직 계약건수와 매출이라는 두 가지 숫자로만 설명되었습니다. 영업관리와 고객관리를 위해 더 이상 숫자와 친해지는 일을 멀리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엑셀을 배웠고, 고객리스트와 월간계획, 성과피드백등을 엑셀을 통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숫자와 친해질수록 소득은 높아졌고, 영업은 체계화되었습니다.
이후 사업을 하면서도 숫자는 사업의 시작과 끝이었습니다. 저는 늘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고, 저보다 숫자에 강한 동료와 함께 사업을 꾸려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막연하게만 느낄 뿐 단 한 번도 숫자에 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저는 숫자의 감각을 잃어버렸고, 하는 일마다 실패를 맛봐야 했습니다. 그런 실패들을 이겨내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은 제 삶의 등불이 되어주었고, 늘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역시 저에게는 숫자보다는 글이 더 친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이나모리 가즈오의 회계경영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숫자 너머에 있는 진실에 다가가라"고.
그렇습니다. 저는 늘 숫자를 그저 숫자로만 이해할 뿐, 그 숫자 너머에 있는 진실은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늘 이상적이었던 저는 내 생각 너머만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숫자가 내가 다가가야 하는 고객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 숫자가 내가 운영하는 회사의 상태를 깊숙이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요.
이런 일련의 과정과 시행착오를 거쳐오면서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조금씩 깨우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읽었던 <공무원이여, 회계하자>라는 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출장비를 소홀히 하는 사람이 과연 더 큰 업무에 대해서 정성스럽게 할 수 있을까요?
그냥 스치듯 읽고 지나갈 수 있는 말이었지만, 저는 이 말이 어쩌면 회계를 대하는 가장 상징적인 문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 수 있는 작은 비용처리, 그런 비용에 대한 원칙, 처리방식과 같은 사소한 것들이 회사와 조직을 움직이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공무원이 이 책의 저자와 같은 태도로 행정에 임한다면 우리나라는 얼마나 멋진 곳이 될까? 아니 어쩌면 이미 우리나라가 이토록 선진국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가 이런 훌륭한 공무원분들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매모호한 말을 많이 한다는 건 그 사람 생각이 모호하거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매한 생각을 정리하면 명료해진다. - 한근태
책에 인용된 한근태 작가님의 문장입니다. 글은 우리를 끊임없이 성장시키지만, 자칫 애매해질 수 있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내가 쓴 의도를 상대방이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그건 그거대로 또 의미 있는 일이긴 하지만, 어떤 일에 있어서 반드시 명료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숫자는 그 애매모호한 것들을 명료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새삼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