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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May 18. 2023

#_성장을 만드는 마법의 단어, "다시"

반복은 철학적이다.

저는 요즘 매일 낭독을 합니다. 

예전부터 종종 했었는데, 작년에 강사과정 수업을 하면서부터는 거의 매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에 올해 5번째 책(드림리스트-짐론) 낭독을 마치고, 이번주부터는 제임스 앨런의 <삶의 법칙>을 낭독하기 시작했습니다. 낭독을 하면 함께 낭독하기로 한 단톡방에 녹음파일을 올리는데, 오늘 낭독 파일을 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선생님께서 녹음상태가 조금 이상하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실제로 녹음된 파일을 들어보니 소리가 매우 작고 감이 무척 멀게 느껴졌습니다. 이유를 찾아보니 저는 주로 컴퓨터로 녹음을 하는 편인데, 녹음프로그램에서 설정된 마이크가 잘못 설정된 게 원인이었습니다. 제가 낭독을 하는 건 소리 내어 읽는 것을 통해 조금 더 깊이 있는 독서를 하는 것이 목적이지, 누군가에게 들려주거나 제가 다시 듣기 위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다 보니 낭독한 파일을 다시 듣지 않아서 생긴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낭독한 파일을 오디오북처럼 듣고 독서하시는 분도 계시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다시 녹음하면 될 일입니다. 조금 귀찮긴 하지만, "그래, 다시 녹음하자"라고 생각하면서 문득, 낭독으로도 재독을 하는 것 역시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다시"라는 단어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다시'의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습니다.


1.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

2.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3.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하여

4. 다음에 또

5. 이전 상태로 또


즉, 반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반복에는 항상 힘과 방향성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속성에 주목해서 사전적 의미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 : 단순 반복을 말합니다. 단순 반복은 방향성이 없는 상태이므로 성장의 힘이 없습니다.

2.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 의식적인 반복을 말합니다. 의식적인 반복은 "이전보다 더 낫게"하려는 의도와 방향성이 있습니다. 제가 낭독파일이 잘못되어 "다시" 녹음하는 이유는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겠지요. 이러한 '의식적인 반복'을 다른 말로 '훈련(training)'이라고 합니다. 삶을 성장시키는 중요한 원동력 중에 하나입니다.

3.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하여 :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 뜻에는 멈춰있는 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성장을 하다가 멈출 때가 있지만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4. 다음에 또 : 의식적으로 좋은 것을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제 먹은 점심메뉴가 참 괜찮아서 조만간 다시 먹기로 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5. 이전 상태로 또 : 원치 않는 것으로 회귀하는 반복을 말합니다. 기껏 살을 뺐는데, 이전 몸무게로 다시 돌아간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반복은 뇌의 언어입니다. 또한 반복은 철학적이며, 생명과 존재의 근원에 맞닿아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내가 의식적으로 원하지 않는 상태를 단순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이전까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죠.

하지만 의식적인 반복(훈련)을 통해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성을 되찾고, 매번 "다시" 반복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습니다. 때로 그 성장이 멈추더라도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다만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깨어있지 않고, 뚜렷한 방향성을 유지하지 못하면, 우리의 무의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치 않는 예전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좋은 반복은 유지하고 나쁜 반복은 끊어낼 수 있을까요?


세컨드 브레인에서 발견한 노자선생의 통찰


어제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발견한 문장인데요. 이 문장이 참 좋아서 <도덕경> 원문을 찾아보았습니다. 참고로 노자는 도덕경외에 남긴 문헌이 없기 때문에 '노자'라는 단서만 있다면, 우리는 도덕경에서 쉽게 원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도덕경 48장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爲學日益, 爲道日損(위학일익, 위도일손)

저는 이 문장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배움은 매일 더하는 것이고, 도는 매일 덜어내는 것이다."


손(損)을 덜어낸다는 단어로 표현한 것은 성서에 등장하는 첫 번째 동사인 히브리어 '바라(בָּרָא)'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라'라는 단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는 의미와 동시에 '덜어내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필연적으로 덜어내는 행위에서 완성됩니다.


창조적인 삶은 필요 없는 것들을 매일매일 걷어내는 행위다.


배철현 교수의 <수련>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바라라는 동사에 대한 설명 역시 그 책을 통해 알게 된 개념입니다. 저는 이 바라(בָּרָא)라는 단어를 통해 창조의 본질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통찰을 근거로 도덕경에서 언급한 爲學日益, 爲道日損(위학일익, 위도일손)을 "배움은 매일 더하는 것이고, 도는 매일 덜어내는 것이다"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쉽게 설명해서 배움은 재료를 모으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료를 많이 모으기만 한다고 해서 배움이 완성되지 않죠. 책을 많이 읽기만 한다고 성장하는 게 아닌 것처럼, 글로 쓸 재료만 많이 모은다고 해서 좋은 글이 써지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충분히 재료를 모았다면 그중에서 나에게 필요 없는 부분들을 과감히 버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만 있고 -가 없는 창조는 결코 의미 있는 작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 좋은 것이고 -는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해석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것은 더 큰 순환과 창조를 위한 성장의 과정일 뿐이니까요.

이것을 다시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면 2단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단계 : 매일 반복해서 우리 삶에 더 나은 것을 채워가는 행위

2단계 : 매일 반복해서 우리 삶에 불필요한 것을 비워가는 행위


비우는 것 자체가 완성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채우는 것이 완성이냐 그것도 아니지요. 이것 역시 이분법적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하고, 순환하고 성장합니다.

2단계에서 불필요한 것을 비웠다면 다시 1단계로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비운 곳은 더 나은 것으로 채워가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우리 삶을 더 아름답게 다듬고 완성해 가는 길일테고, 그런 과정 자체가 예술 아닐까요?

저마다의 우리 삶이 작품인 이유입니다. 우리 삶은 다 시입니다.



* 매일 책 속의 좋은 문장을 나눕니다.

* 오늘 문장은 배철현의 <수련>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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