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병목현상처럼 입구는 좁은데 나오려고 하는 내용물이 너무 많을 때 종종 글쓰기의 정체현상을 겪게 됩니다. 글을 꾸준히 써온 분들은 다 한 번쯤은 경험하는 일일 테지요.
오늘도 글을 한편 써야지 하고 책상에 앉아보지만, 유난히 머릿속이 하얗습니다.
이전에 쓰다만 글들을 살펴보고 일부 내용을 채워 넣은 글도 있지만, 글 하나로 완성하기엔 갈 길이 멉니다. 일어나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책장들을 살펴봅니다. 오늘은 어떤 책을 읽어볼까 벌써 5권째 책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잠깐 읽으려고 했다가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책도 있고, 이 문장은 글로 써야겠다고 생각해서 가지고 오는 책도 있습니다. 책상 위에 몇 권의 책이 쌓입니다. 오랫동안 책상에 머물러 있는 친구들 중 몇몇은 잠시 책장으로 옮겨줘야겠습니다.
오늘 저의 상태와 딱 맞는 문장을 정혜윤 작가의 <아무튼, 메모>에서 발견합니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잘 해내고 살기에도 시간과 힘은 터무니없이 부족해. 세네카가 말했어. 삶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을 낭비한다고.
정말로. 세네카의 말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저를 베고 지나갑니다. 삶이 짧은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거죠. 결국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이 낭비되는 줄도 모르고 말이죠. 작가는 이어서 말합니다.
이건 말뿐이고 현실 세계의 나는 늘 삶을 낭비한다. 늘 쓸데없는 일에 힘을 빼앗긴다.
처음 문장이 칼날 같았다면 이번 문장은 공감의 망치로 두드려 맞았달까요. 어쩜 이리 내 마음과 같은지 말이죠. 아는데 잘 안 되는 게 사람인지라. 그렇게 또 비슷한 하루를 나에게 의미 있는 시간보다는 낭비하는 시간이 더 많은 채로 끝내고 말았던 수많은 날들을 돌아봅니다. 작가의 글이 거울처럼 내 내면의 꾀죄죄한 얼굴을 적나라하게 비춥니다. 어쩌면 이 글은 저의 때 묻은 내면을 씻어내는 세수물이 아닐까 싶네요.
저는 부정적인 문장의 글을 그리 좋아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글도 나를 씻어내고 단련하는 좋은 계기가 됨을 느낍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십니다. 매일 마시는 커피인데 조금 더 쓰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겠죠?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저를 바라봅니다. 오늘 이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때론 방황하더라도 잠시 눈을 감고 명상하고, 소리 내어 낭독하고, 글을 쓰며 마음의 얼굴을 세수하는 시간이 상쾌합니다. 페소아가 말한 것처럼 한 뼘씩 내면의 땅을 매일 더 넓혀 나가 봅니다. 그러려면 오늘을 조금 더 충실히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낭비를 줄이려고 애쓰기보다는 충실히 보내는 시간을 조금씩 넓혀가야 합니다.
아무튼 매일 뭐라도 써야 합니다. 어쨌든 매일 뭐라도 해야 합니다. 그게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매(메)일 뭐(모)라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