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가 넘어서 갑자기 아내가 운동삼아 카페에 다녀오자고 했다. 아침 일찍 사무실 갔다가 오후에는 일산에서 약속이 있어서 다녀왔고, 저녁에도 한참을 걸어서 집에 온터라 조금 피곤했는데, 또 나가자니..ㅎㅎ 조금 귀찮아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의 필살멘트를 날린다.
"그럼 나 혼자가?"
아오 정말.. 저 멘트에 이겨본 기억이 거의 없다. ㅋㅋ 막상 투덜거리긴 했지만, 아내와의 산책 데이트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언제든 오케이니까. 11시까지 하는 매장은 교보타워 사거리까지 한참 걸어가야 하지만, 커피보다는 산책이 목적이니 어디든 좋다. 그렇게 한참을 산책하고 커피 한잔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핸드폰에 1만보를 걸었다는 메시지가 뜬다. 생각해 보니 제법 오랜만이다.
작년에는 압구정 사무실로 출퇴근할 때 특별한 일 없으면 걸어간다는 원칙을 세워놓았기에 거의 매일 1만보는 거뜬히 찍었다. 그런데 지금 대학로 쪽으로 이사 오고 나서는 버스 타고 출퇴근하다 보니 5천보가 고작이다. 그마저도 버스를 환승하지 않고 한 번에 가는 버스만 타기 위해 조금 멀리까지 걸어간 덕분이다. 언젠가 읽은 <걷는 사람, 하정우>의 문장이 떠오른다.
뭐든 꾸준히 하려면 그것이 특별활동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야 한다.
작년에 나에게 1만보 걷기는 특별한 운동도 목표도 아니었다. 그저 걸어서 출퇴근한다는 작은 원칙하나를 지킨 결과물일 뿐. 그 사소한 변화 덕분에 매일 5km 정도 걷는 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물론 요즘은 하루 2km 정도밖에 안 걷고 있지만. ㅠㅠ)
1월 말부터 매일 낭독하는 습관을 들인 덕분에 4달 동안 6권의 책을 낭독할 수 있었다. 매일 짧게는 5분에서 길면 15분 정도 낭독하는데, 매일 하는 습관이라는 게 참 대단한 것 같다. 사실 낭독은 몇 권을 읽겠다거나 하는 목표는 전혀 없다. 그저 읽은 책 중에 소리 내어 한번 더 읽고 싶은 책을 골라 매일 조금씩 낭독하는 게 좋다. 깊이 있게 책 속을 유영하는 기분이랄까. 좋은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나 자신을 정화하는 기분이 든다.
지난 3달간의 기록들
2월부터 시작한 명상은 100일 넘게 매일 했었는데, 어제 평소와 다른 일상을 보낸 탓에 하루 빼먹었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괜찮다. 기록 세우려고 명상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오히려 약간의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홀가분하기도 하다) 그래도 매일 체크해 주는 애플리케이션이 있으니 확실히 꾸준히 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3월부터 매일 한편이상 글을 쓰는 것도 5월 말이 되니 100편이 넘었다. 매번 글마다 다른 책 속의 문장을 하나씩 인용해 나가다 보니 읽은 책 역시 100권이 훌쩍 넘었다. 물론 다 완독 한 건 아니지만, 매일 다른 책을 읽으며 새롭게 발견하는 문장이 있고, 알고 있었지만 다시 더 깊이 음미하게 되는 문장들을 만나게 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몇 달 사이 새로 산 책도 80권이 넘었다. 정작 사놓고 펼쳐 보지도 못한 책이 20권도 넘는 것 같다. 그럼에도 그때그때 필요한 책을 사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일이다. 이런 일상 하나하나는 작고 대단할 것 없는 일들이지만, 독서를 강의하고 글쓰기를 강의하는 사람으로서는 꼭 필요한 일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강의를 준비하고, 강의하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그 밑바닥에 당연한 일상의 습관처럼 보내는 시간들이 가장 나다운 색깔을 만드는 재료들이 될 거라 믿는다.
걸음수를 일상에서 알뜰살뜰 모아야 한다. 이동할 때 지키는 이 작은 원칙이 내가 하루에 3만 보를 걷는 결정적인 비결이다.
하정우 씨가 걸음을 모은다면, 나는 매일 읽고 쓰며 작은 성장을 모으는 중이다. 작은 성장을 일상에서 알뜰살뜰 모아야 한다. 이 작은 원칙이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결정적인 비결이다. 성실함만큼 훌륭한 지름길은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쉽고 단순한 길을 외면하고 더 빠른 지름길을 찾느라 인생을 낭비한다. 인생의 지름길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인생에서 과연 지름길이 필요한가 싶다. 오히려 조금 돌아가더라도 가는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풍경들을 만나는 이 작고 성실한 일상들이 인생이라는 여행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매일 접어 놓은 책의 한쪽 모서리들이, 하얀 종이 위에 그어놓은 초록색연필의 흔적이, 빨간 노트에 끄적여 놓은 메모들이, 소리 내어 읽고 녹음해 놓은 음성파일들이, 매일 브런치에 쌓여가는 글 한 편 한 편이 참 고맙고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