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사무실을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인분이 택배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딱히 그쪽으로 갈 일이 없기도 하고, 일도 바빠서 며칠 동안 갈 시간이 없다가 하루는 시간을 내어 물건을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주소를 알려드려야 하는 분들에게는 이사한 사실을 말씀드리고, 새로운 사무실로 초대해서 같이 식사를 하거나 차를 한잔 하면서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이처럼 주소를 옮기는 일은 번거롭지만, 내가 어디로 이사했는지만 확실히 알려드리면 이후로는 문제 될 일이 없습니다.
삶에 충실하며 성장하다 보면 예전의 나와 생각하는 게 달라집니다. 사람자체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의식적인 성장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전에 나와는 무척 다른 사람이 되어감을 느낍니다. 문제는 나를 이전부터 알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그들이 처음 인식하고 규정 지어놓은 "예전의 나"가 각인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첫인상이 중요하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첫인상은 시간을 두고 반복되는 만남을 통해 자연스럽게 바뀌게 마련이지만, 1년 이상 혹은 10년 이상 지켜봐 온 사람들의 기억은 단순한 기억이상의 힘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는 '과거의 나'인데, 현재의 내가 성장해서 '새로운 나'로 바뀌었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이전의 나'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시선을 억지로 바꿀 필요는 없지만,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그들의 시선에 발목이 붙잡혀서는 안됩니다.
예컨대 작년까지는 대리였지만 올해 과장으로 승진했다면, 지금은 김대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김과장만 존재합니다. 하지만 거래처 사람들은 여전히 "김대리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내가 더 이상 이전의 나로 머물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가려면 당당히 달라진 나의 모습을 나 자신과 타인에게 어필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나의 자의식이 자꾸 성장하기 전의 나로 머물러 있으려고 하거나 잠깐 성장했다가도 다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완전히 달라진 나의 모습을 보여주면 그만이겠지만, 그 과정이 결코 짧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거쳐서 이루어져야 하는 거라면, 분명히 어떤 부분은 짚고 넘어가주는 게 좋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사무실로 이사했다면, "죄송하지만, 그 곳은 예전 주소여서요. 앞으로는 새로운 주소로 보내주시겠어요?"라고 말하면 됩니다. 승진을 한지 한참 지났는데도 계속 이전 호칭을 쓴다면 "죄송하지만, 제가 이제 직급이 바뀌었으니 바뀐 직책으로 불러주시겠어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성장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의 나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도 비슷합니다.
본의 아니게 어젯밤에 한번, 오늘 아침에 또 한번, 연이어 카페에서 불쾌한 일들을 겪게 되면서 무척 짜증이 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이미 통제를 벗어난 감정은 다스리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마치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청새치와 겨루는 주인공의 심정이었습니다. 제법 긴 시간을 팽팽한 낚시줄을 유지한채 버텨야 했습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그 감정은 이제 지나간 감정입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 과거의 감정을 끌어와서 얻을 수 있는 건 무겁고 짜증 나는 마음뿐일 겁니다. 놔주어야 합니다.
오늘은 비가 오는데요. 집에 오는 길에 우산이 없어 비를 흠뻑 맞고 돌아왔는데, 집에서도 젖은 옷을 입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현재"라는 집에 돌아오면 개운하게 씻고, 보송보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따뜻한 차 한잔을 편안히 즐기는 게 맞지 않을까요?
허연 시인의 시 <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세월이 흐르는 걸 잊고, 이전과 똑같이 살고 있다면 그는 정말 "나쁜 소년"입니다. 파편 같은 과거 삶의 조각들을 처연하게 펼쳐놓고, 이미 늦었다고, 인생 뭐 있냐고 말한다면 정말 무섭도록 슬픈 일일 겁니다.
아직도 과거의 젖은 옷을 입고, 현재라는 집안 곳곳에 물을 뚝뚝 흘리면서 밖에 비가 오는 것을 탓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려 합니다. 과거의 나의 모습은 그저 과거일 뿐입니다. 저는 이제 그 곳에 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