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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May 25. 2023

#_공감에 대하여

공감이 부족하다는 것은 공기가 부족한 것과 비슷하다

저는 공감력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그나마 많이 개선되었다고 느끼지만,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거나 글을 읽거나 영상을 보면서 공감의 벽에 막히곤 합니다. 타인을 진심으로 공감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지금보다 더 공감력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충분히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사람들을 쉽게 판단했고, 저의 판단이 틀렸을 거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타인의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타인의 사고방식에 상상으로 동조할 수 있는 능력, 이를 '논리성'이라 부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저는 무척 논리성이 떨어지는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늘 저만의 사고방식에 갇혀서 타인의 사고방식으로 접근한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문제들은 그런 논리성의 부족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20대에는 늘 제가 생각했던 것들이 결과적으로 옳았습니다. 그래서 늘 내가 옳다고 의심 없이 믿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무척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였고, 자만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공감은 철저하게 내 사고방식 안에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건 공감이 아니라, 어설픈 이해에 불과한 것인데, 그때는 몰랐습니다. 책을 읽고 조금씩 내면이 성장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뜻하지 않은 어려움들을 겪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생각은 매우 한정적이며,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지금도 여전히 저는 공감력이 부족합니다. 저도 모르게 타인의 마음을 제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려 들기 때문이죠. 다만 그게 온전한 방식이 아님을 알기에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고자 노력할 뿐입니다.

이해가 산소마스크를 통해서 들어오는 공기라면, 공감은 그 공간을 채우는 공기 그 자체입니다. 하여 공감이 없는 공간에서는 마치 산소가 부족한 것 마냥 숨이 막히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공감이 넘치는 공간은 울창한 숲 속을 거니는 것처럼 그저 걷기만 해도 좋은 공기를 마시는 기분입니다.


작가의 글 어디에도 공감이라는 단어는 없고 논리성이라는 단어만 있지만, 이 논리성의 완성이 바로 공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감은 때로 논리성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둘째가 독감에 걸렸는지, 아침에 같이 병원에 갔다가 함께 사무실로 왔습니다. 아침 점심 죽만 주자니 영 마음이 불편합니다. 왜 독감에 걸렸는지, 누구한테 옮았는지, 학교도 못 가고, 병원 갔다가 함께 사무실까지 오려니 또 다른 의미로 불편한 게 많습니다. 그런 건 어디까지나 제 입장입니다.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학교를 못 갈 정도로 아프다는데 얼마나 힘들까요. 다행히 약 먹고 아픈 건 덜하다고 하는데, 아직 열은 떨어지지 않아 걱정입니다. 이처럼 아이가 아프고 힘들 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그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요. 제가 그의 아픔에 공감한다고 해서 그 아픔이 줄어들진 않겠지만, 적어도 함께 있는 공간에서 따뜻한 공감의 공기를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책 속에서 발견한 좋은 문장을 나눕니다.

*오늘 문장은 우치다 타츠루의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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