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공부는 망치다

(유영만/나무생각) 삶의 진정한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

by 변대원

좋은 책은 여러 번 읽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책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책을 읽고 세상을 공부하고 나 자신을 공부하는 게 일이 되어버렸는데요. 이 책은 여러 번 읽었을 뿐 아니라, 책 전체를 필사도 하고, 소리 내어 낭독으로 읽기도 한 책이라 저에겐 더 각별한 책입니다.

사람마다 성장의 디딤돌이 되는 책들이 있는데 저에겐 이 책이 그런 디딤돌이었고, 이 책을 시작으로 다양한 유영만 교수님의 책을 읽고 좋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러 번 읽다 보니 특히나 저에게 울림을 주었던 문장들을 따로 뽑아 그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해 놓기도 했는데요. 오늘은 한 문장씩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그 상대나 대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더 알기 위해 공부에 빠져든다. 공부에 빠지면 보이진 않았던 부분이 보인다. 그때 보이는 것은 공부하기 전에 봤던 것과는 다르다. 공부는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반복하는 과정이다. 공부를 통해서 우리가 닦아야 될 덕목은 단편적 지식이 아니라 내 몸으로 익힌 체험적 지혜다. (p.12)


공부는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알고 보게 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체험해서 얻은 것들만이 실제로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지식이 됩니다. 지혜란 어쩌면 내 삶에 활용 가능한 지식 속에서 꽃 피우는 게 아닐까요?




공부는 그 자체가 삶이자 목적이다. 공부하는 삶을 통해 어제보다 더 나아지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아름다움, 즉, 나다움으로 색다름을 드러내려고 한다. 나다움을 더욱 빛나게 만들기 위한 위기지학의 공부야말로 공부의 기본이자 핵심이다. (p.15)


인생은 무언가가 되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되려고 사는 것입니다. 나를 알고(알음) 나답게 사는 것(나다움)이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꽃은 어떤 땅에 떨어져도 다른 싹을 틔우지 않습니다. 늦게 피는 곳이 일찍 피는 곳을 시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만의 색, 자기만의 향, 자기만의 모양, 자기만의 때를 알고 피어납니다. 그래서 꽃은 아름답습니다. 공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인 이유는 ‘나답게’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지루한 반복, 그러나 진지한 반복만이 완벽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지겹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해내려고 애쓰는 마음이 어제와 다른 나를 만들어준다. 위대한 탄생은 지루한 반복 끝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p.27)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고들 합니다.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인생은 반복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 반복을 우리는 습관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노력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타성이라 부르기도 하고, 훈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매일 ‘완벽한 하루’를 살기 위해 연습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반복 끝에 찾아오는 위대한 탄생. 그것이 바로 축적의 길입니다. 위대함은 오직 새로운 반복으로 통한 축적에서만 탄생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생각하는 선순환의 과정을 거치면서 공부의 깊이와 넓이도 심화․확산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에 머무는 생각은 아직 공부가 아니다.(p.33)


공부는 자신이 아는 것을 더 깊이 알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공부는 자신이 아는 것이 깨지는 과정입니다. 깊이 알수록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앎이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넘지 못한 공부는 진정한 공부가 아닌 셈이지요.

“인식에 이르는 길 위에서 그렇게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

니체가 말한 이 문장은 공부란 무엇인지를 조금 더 깊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배우는 사람만이 자기 삶의 주인(主人) 행세를 할 수 있다. 주인이 된 사람은 주체적 의지로 ‘어둠’을 밝혀 ‘얻음’으로 창조해낼 수 있다. 배움learn은 그래서 얻음earn이다.(p.39)


사람들은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잊곤 하지요. 무대의 주인은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대의 주인공은 진짜 자신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관객들은 내 인생의 무대에 조명이 켜진 부분만 볼 수 있지만, 인생의 주인인 나는 조명 밖의 어둠에 존재하는 나의 실체를 아는 사람입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단순히 머리를 써서 기억한 지식은 오래가지 못하고 설득력도 없다. 몸이 체험하는 고통 끝에 고도의 노하우가 몸속으로 들어와 각인되는 과정이 바로 체득(體得)이자 체화(體化)다.(p.43)


책에는 선일금고의 김용호 회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금고라도 열 수 있는 그의 놀라운 재주를 말이나 글로는 설명하거나 전수해 줄 수가 없죠. 장자 천도편에 나오는 환공과 윤편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성인의 말씀을 읽고 있는 환공에게 윤편은 그것은 성인들이 남긴 찌꺼기(糟魄,조백)라고 말합니다. 윤편의 말대로라면 책에 있는 지식들 역시 작가가 남긴 깨달음의 찌꺼기입니다. 그 찌꺼기가 살아 꿈틀대는 지식이 되는 과정은 직접 체험하고 반복하는 고통 속에서 체득됩니다.




공부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이면의 힘이나 구조를 밝혀냄으로써 보이지 않는 힘이나 구조가 보이는 현상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다.(p.50)


눈에 보이는 현상 뒤에는 늘 보이지 않는 본질이 있습니다. 사람 역시 그저 하나의 객체로 이해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요.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거대한 연결망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공부는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입니다.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지요. 보이는 것에만 현혹되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나무의 잎사귀가 마르면 잎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나 줄기, 어쩌면 뿌리에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저도 말은 쉽게 하지만, 깨달음은 언제나 말처럼 간단하진 않습니다.




공부는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내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운명적인 사건이다. 사건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는 비교할 수 없는 생각의 도약이 일어난다. 그래서 생각의 혁명이 일어나는 사건을 만나는 순간 나는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공부는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몰고 온다.(p.62)


공부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가 같다면 몇 시간 혹은 며칠이 걸렸다고 해도 그것은 읽은 것이 아닙니다. 공부는 운명을 바꾸는 낯선 마주침이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무언가를 알고 나면 그것을 모르던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에서 언급한 것처럼 “읽어버린”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저는 종종 뭔가를 알고 난 이후의 내가 불과 얼마 전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곤 하지요. 그래서 알면 알수록 겸손해지려고 노력합니다.




물음이 있는 곳에 답도 있다. 공부를 해 색다른 깨달음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에 어제와 다른 물음표가 살아나야 한다.(중략) 공부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타성에 물음표를 던져 당연한 게 없음을 깨닫는 과정이다. 공부는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며 별다른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영역에 물음표를 던져 생각의 타성에 탄성을 부여하는 과정이다.(p.71)


타성의 타(惰)는 ‘게으르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성은 질문이 게을러진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이 없어지면 모든 걸 당연하게 여깁니다. 당연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변화의 기회는 사라집니다. 당연하다는 생각을 걷어내면 질문들이 생깁니다. 그걸 우리는 호기심이라고 부르지요. 아이들은 당연한 것이 없기 때문에 끝없는 호기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호기심은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힘이며, 관심이자 사랑입니다. 오직 질문이 있는 곳에만 사랑이 있습니다.




디폴트 세팅을 바꾸지 않고 초기 설정된 대로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성향은 경로의존성(徑路依存性, path dependency)이라는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중략) 이처럼 과거에 의존했던 사고방식이나 경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성향을 다른 말로 고착효과lick-in effect, 매너리즘mannerism, 또는 관성inertia이라고 한다.(p.95)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사회의 디폴트 세팅값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을 흔히 상식이라고 부르지요. 상식적인 사람은 안전하지만 금세 식상해집니다. 인간의 뇌가 끊임없이 안전을 위해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디폴트 값은 매우 중요합니다. 생존과 직결되는 상황에서 질문하고 사색한 이후에 반응하면 늦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반복되는 행위는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습관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습관은 생존의 관장하는 뇌의 본성이기 때문에 매우 강력합니다. 본문에서 말한 다양한 표현도 본질적으로는 뇌의 같은 기능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지요.

문제는 인간이 안전한 상태에서조차 그 습관을 떼어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오랜 시간 인류가 생존을 위해 구축해온 디폴트 값을 이해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에 맞게 그 값을 수정합니다.

그 값을 수정한 사람만이 진짜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본문에서 말한 공부의 진의(眞儀)가 아닐까요? 이제 남은 질문은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입니다.




‘덕분(德分)에’라는 말은 ‘덕(德)’을 ‘나누어(分)’준다는 말이다. ‘때문에’라는 말은 핑계와 자기합리화를 위해 둘러대는 말이지만 ‘덕분에’라는 말은 당신이 나에게 덕을 나누어준 그 덕분에 내가 잘되었다는 말이다.(p.101)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지요. 사자성어가 아니라,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 편향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잘되면 자신이 잘한 것만 생각하지만, 대체로 잘된 일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이 숨어있습니다. 그게 잘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그렇습니다. 반대로 무언가 잘 안된 일은 내 탓일 가능성이 크지요.

그런 의미에서 덕분이라는 말은 단순한 겸손의 말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나 때문에’라고 해석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반드시 성장합니다.




공부는 아무리 작은 결과라고 할지라도 혼자의 힘으로 만들어낸 외로운 투쟁의 산물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노력해서 만든 합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수행의 과정이다.(p.105)


공부는 거인의 어깨를 빌려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인류가 만든 거대한 지성의 탑 위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저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지금 제가 아는 것도 보잘것없는 수준이지만, 설령 더 많은 것을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고 할지라도 자만할 수 있는 부분은 1도 없음을 느낍니다. 혼자 이룩한 공부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나의 공부가 나의 사익만 추구하는 방편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정해진 길 위에서 가장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공부는 아무도 걸어가지 않는 길을 찾아 새로운 길을 내거나 지금 걷고 있는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하는 탐구의 과정이다.(p.109)


언젠가 장석주 시인의 책에서 ‘상투적인 글은 죄악에 가깝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공부는 성공을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지만, 그런 상투적인 해석은 공부에 대한 실례가 아닐까요?

정해진 길을 빨리 가기 위해서는 ‘검색’이 필요하지만, 진짜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사색’이 필요할 것입니다. 공부란 세상이 정해 놓은 답을 쫓는 과정이 아닌 내 삶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자기의 존재 이유를 알고 가장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p.114)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성경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수영을 배우는 이유는 뭘까요? 수영을 잘하기 위해서일까요? 저는 물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책을 잘 읽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서 읽는 것이죠. 운전을 처음 배울 때는 모든 게 부자연스럽지만, 운전을 배우면 자유로워집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인생을 제대로 아는 것이 공부이기에 공부하는 사람만이 자기 삶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발견한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관점(觀點)은 시점(時點)이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을 과거에서 보는가, 현재에서 보는가, 아니면 미래에서 보는가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 관점은 또한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時角)이다. 보려고 하는 것만을 선택해서 보는 눈이다.(p.143)


우리는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볼 때 나의 위치와 입장이라는 하나의 시점(視點)에서 대상을 바라봅니다. 점과 점이 이어져 선이 되듯 내가 보는 방향에 따라 하나의 시선(視線)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시점이 다른 시선마다 시각(時角)의 차이가 생깁니다.

같은 것을 봐도 다양한 시점에서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고, 필연적으로 저마다 다른 시각이 생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공부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면 시야(視野)가 넓어지는 것이지요. 반대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시야가 좁아지고, 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공부를 멈출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책을 읽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책을 읽는다고 해도 책에서 인생의 보물을 캐내는 사람이 별로 없는 이유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과 뚜렷한 목적의식, 그리고 간절한 문제의식 없이 대충 읽기 때문이다.(p.147)


딸이 초등학교 1학년일 때 그 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독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도대체 책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책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비밀을 말해준단다.”

책 속엔 분명 보물이 묻혀있는데 그걸 꺼내기 위해 깊숙이 책을 파는 사람은 별로 없죠. 책 속에 묻힌 보물이 무엇인지, 책일 말해주는 비밀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틈만 나면 책을 읽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책을 5번만 다시 읽어보세요. 그 책 속에 묻혀있는 보물을 발견할지도 모른답니다.



예전에는 몰랐던 사실이나 원리와 새로운 패턴을 발견하면서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생각의 깊이와 넓이가 심화되고 확산되는 과정이 곧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이다. 생각의 성장이 곧 사람의 성장이다.(p.156)


독서는 생각하는 힘을 길러줍니다. 생각하는 힘이 길러진다는 것은 운동을 하면 근육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내면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성장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안목은 깊어집니다.




안in에서 다르게 보려면sight 밖out에서 다르게 본 것들sight이 새롭게 입력되어야 한다. 밖에서 본 체험적 자극outsight이 바뀌지 않으면 안에서 일어나는 통찰력insight도 바뀌지 않는다.(p.188)


기획은 책상이 아니라, 현장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책상에서 머리를 싸매어보아도 실제 현장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좋은 기획이 나올 리가 없겠지요.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내가 모르던 새로운 것을 입력하는 것input입니다. 입력값이 바뀌어야 결과output도 바뀌기 때문이지요. 본문의 문장처럼 outsight가 없으면 insight도 없는 것이지요.

공부는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매일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장이 축적될수록 삶은 풍요로워집니다.




말에 그 사람의 감정이 담겨 있듯이 글에도 그 사람의 삶이 담겨 있다.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이 느껴진다. 내가 쓴 글이 곧 나다.(p.199)


글의 힘은 강합니다. 책을 읽는다고 그것이 확실하게 내 것이 되지는 않지만, 내가 쓴 글은 확실하게 내 것이 됩니다. 읽을 때는 내가 그것을 아는 것 같지만, 글로 써보면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쓴 글이 곧 나다’라는 문장에 깊이 동의합니다.

써본 사람만이 압니다. 읽은 만큼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만큼 성장한다는 사실을요.




글 쓰는 과정은 어디까지가 내 생각인지, 지금 하는 말이나 쓰는 글이 내 육신의 고통 체험 속에서 터득한 것인지를 드러내 놓고 확인하는 과정이다.(p.209)


글을 쓰면 내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일수록 글을 써야 합니다. 그 글 속에서 나의 실체를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구름처럼 흘러가고 사라지지만, 글로 남긴 것은 비처럼 나의 대지를 두드리고 안으로 스며듭니다.




‘자유(自由)’는 ‘자기(自己)의 존재 이유(理由)’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남과 비교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래서 자유롭지 못하다.(p.236)


공부하는 이유는 자기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존재의 이유를 찾으면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옷은 멋진 옷도 아니고, 비싼 옷도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하는 옷입니다. 가장 잘 맞는 옷이 가장 자유로운 옷인 것처럼 가장 나다운 것이 가장 자유롭습니다. 남과 비교한다는 것은 나의 기준이 아니라, 남의 기준으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기준이 남에게 있으니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할 수밖에 없지요. 공부는 자기 각성의 과정이 그 각성은 나다움의 발견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런 공부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맛본 사람은 평생 공부를 멈출 수 없는 법입니다.




경이로운 진리 체험을 맛본 사람들은 맹자에 나오는 욕파불능(欲罷不能)의 상태에 이른 사람들이다. 욕파불능이란 그만두고 싶어도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상태, 즉 공부하는 사람이 도달하고 싶은 궁극의 상태를 말한다.(p.243)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그 음식점에 또 가고 싶어 집니다. 무언가 좋았던 것을 직접 체험하고 나면 다시 그것을 체험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지요. 진리가 주는 자유의 기쁨을 맛본 사람 역시 그 체험을 반복하고 싶어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입니다. 맹자의 말처럼 그만두고 싶어도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자신을 망가뜨리는 방향으로 반복되는 것은 ‘중독’이지만, 자신을 채워가는 방향으로 반복되는 것은 ‘축적’됩니다. 결국 공부는 더 많은 삶의 자유를 축적하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공부를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은 ‘지식’이라기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다. (p.249)


머리로 알고 있던 지식을 실제로 실천해보고 겪어보고 몸으로 느껴보면, 그건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 더 이상 잊을 수 없는 상식(常識)이 됩니다. 상식은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이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무 저항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지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실천을 통해 내가 알던 지식을 상식으로 만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이 말은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어떤 공부를 해왔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는 말로 바꿔 쓸 수 있다. (p.272)


나라는 존재는 아주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간단합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먹고 마신 것의 결과가 내 몸이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이 내 정신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41살이라면 태어나 지금까지 15,000일가량의 하루하루가 누적된 결과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영향을 준 것들은 내 가족, 내 친구, 내 선생님, 내가 읽은 책, 내가 사는 동네, 내가 다닌 여행 등등으로 결정되겠지요. 내가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것조차도 우리는 내가 속해있는 환경에 뿌리 깊게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내 삶에 공급되는 input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 input을 바꾸는 것이 바로 공부입니다. 공부는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위해 내 삶에 공급되는 input을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인 새로운 지식들은 끊임없이 기존의 나의 작은 우물을 깨부수는 망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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